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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천재 시인 최치원, 붓을 들다

2009-11-07

천재 시인 최치원, 붓을 들다
최연소 유학생, 최치원

860년 경, 신라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는 이른바 골품제 사회였다. 최치원 가문은 고위 계층인 6두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최견일은 일개 말단 관리를 역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6두품은 성골과 진골 다음 가는 계급이었지만, 신라의 학문과 사상 면에서 아주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계급이다. 그런데 6두품 계급은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차관급인 ‘아찬’ 이상의 벼슬엔 오를 수 없었고 계급의 한계성 때문에 사실 경륜을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포부를 펴기 위한 방안으로 당나라 유학이란 방법을 택하게 된다.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급제했다는 권위로써 우리나라에 돌아와 자신들의 경륜을 펴려고 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치원은 12살이란 가장 어린 나이에 홀로 배에 올랐다.

오랜 유학 기간 동안 유학생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생활비 조달이다. 최치원은 나중에 신라에 돌아온 후, 중국 정부에 따로 글을 보낼 정도로 유학생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 간 868년에 당시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는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 때 국자감은 천 여 명 정도를 수용하는 규모로 당 태종 때 숙소를 1200개나 지었고, 학생은 8천 명이나 된다. 원래 중국 학생이 3천명이었는데 나중에 고구려, 신라, 백제, 투루판 등에서 학생이 많이 와서 8천명이나 될 정도로 유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국자감의 수학 기간은 9년으로 수년을 공부하지만, 평생 급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과거에 급제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최치원은 중국에 건너 간 지 단 6년 만에 장원 급제를 달성했다.


천재 시인 최치원

과거 급제 후 ‘율수현위’라는 관리에 임명된 최치원은 당나라 전통 문화에 따라 과거 급제자로서 중국의 명승지를 유람하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유명 시인 ‘두순학’은 물론 유명 문장가들과 더불어 명승지 곳곳에서 직접 지은 시로 절경을 노래했는데,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또한 시 안에 녹아들었다. 당시 최치원이 남긴 시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 소개될 정도로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한시는 뜻만 가지고 두는 게 아니라 운이나 평측이 다 맞아야 되는데 최치원은 어려서 중국에 가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중국 사람하고 전혀 다르지 않게 시를 쓸 수 있었다. 더구나 공부를 통해 실력이 쌓였기 때문에 인용하는 고사가 전혀 틀림이 없고, 시제가 뛰어나 당나라 유명한 시인들과 교류하면서도 전혀 외국 사람이라는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들이 최치원의 문장이 당나라를 감동시켰다고 말할 정도로 특출났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문장집이 바로 계원필경이다. 계원필경은 최치원 자신이 직접 고른 시 50수, 문장 320편이 담긴 최치원 문집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역사적 가치이다. 계원필경은 당시 사람이 쓴 당대의 역사책으로 중국 정사에서 빠진 부분까지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 정사에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계원필경을 근거로 수정하고 있다. 이처럼 매우 정확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율수현위를 그만 둔 최치원은 중국 양주 당성으로 이주해 절도사 ‘고병’의 휘하에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875년 당시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수도 장안까지 점령된 상태였는데, 이때 최치원의 글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바로 ‘토황소격문’으로 황소 토벌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고병’을 대신해 최치원이 쓴 격문이다. 최치원은 이 격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중국 역사에 이름을 떨쳤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이 진압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중국 황제로부터 ‘금 허리띠’까지 하사받았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 중반으로 중국에서는 큰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최치원의 귀환

885년,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귀국과 동시에 최치원이 신라에서 받은 직책은 한낱 지방 태수에 불과했던 ‘한림학사’였다. 한림학사는 최치원이 자신의 경륜과 포부를 펴볼만한 적합한 직책이 아니었다. 여기에 당나라 유학파와 국내 국학 출신간의 갈등이 심해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외직을 자청해 절령군 태수나 부산군 태수로 나가서 외직으로써 백성들을 가까이 하면서 민생고를 직접 목도하면서 정치를 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최치원은 그 누구보다 조국 신라의 안녕을 걱정하는 이로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이에 일종의 사회개혁안이었던 ‘시무 10여조’를 만들어 진성여왕에게 보냈다.


시무 10여조
최치원이 시무10여조를 바쳤다고 하는 것은 현실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최치원은 ‘골품제의 개혁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만이 위기에 빠진 신라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진성여왕도 그 건의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려서 ‘아찬’이라는 당시 6두품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을 줬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그의 시무책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크게 실망한 최치원은 이후 각지를 유랑하다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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