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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승려가 된 왕자, 의천의 이유 있는 밀항

2009-11-28

승려가 된 왕자, 의천의 이유 있는 밀항
왕자 의천, 승려가 되다

고려의 찬란한 전성기를 이룩한 국왕으로 평가받는 11대 문종은 ‘인예태후 이씨’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 의천은 11살의 나이에 화엄종 종단인 영통사로 출가했다. 당시 고려는 국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사찰은 아주 유력한 경제 집단이었고, ‘승려가 된다’는 것은 출세의 의미를 가지는 일이기도 했다. 의천은 출가한 지 2년 뒤인 13살에 승통의 직위에 올랐다.

‘승통’이란 것은 글자 그대로 승려를 통솔하는 자리로 고려가 승려들에게 주었던 6단계의 승계 가운데 최고위직에 해당한다. 고명한 승려 가운데서도 40대 정도 되어야 승통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의천은 이례적으로 13살의 어린 나이에 승통이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 문종이 화엄종 교단을 장악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왕의 힘으로 승통의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이후 불교와 유교 등 5교에 통달할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던 의천은 서서히 송나라 유학의 꿈을 꾸게 되었다.


송나라로 밀항을 감행한 의천

의천은 19살 때 당시 세자였던 선종 앞에서 불전을 수집, 간행할 뜻을 서약했다. 이에 평생 사업으로 여기며 이를 이루기 위해 중국에 가서 중국 불전을 수집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또 당시 고려 불교계 문제, 특히 고려 불교 교단의 파벌 싸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파 천태종을 개창할 뜻을 세웠다. 이에 의천은 천태종을 전수한다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송나라 유학의 뜻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의천은 중국의 화엄종 승려 ‘정원’과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송나라 밀항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기 1085년 사월 초파일 밤,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열린 연등회 행사를 뒤로 하고 몰래 송나라로 밀행을 감행했다.

1085년 5월, 송나라에 도착한 의천은 송나라 황제가 친히 접견을 나올 정도로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고려를 이용해 요를 견제하려는 정책이 고려인에 대한 특별대우로 이어진 것이다. 의천은 북송의 수도 변경에서 화엄종의 대가 ‘유성법사’와 교류한 후, 항주로 넘어가 많은 승려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 나갔다. ‘정원법사’의 ‘화엄학’을 시작으로 천태종의 기본교리와 수행법까지 장장 8000km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리고 14개월의 유학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천태산 국청사’를 찾아서 비장한 맹세를 했다.


고려로 귀국
송나라에서 수집한 3000여 권의 불교 전적을 가지고 마침내 귀국길에 올랐다. 불전의 수집과 불법의 탐구, 모든 목표를 달성하고 귀국하는 의천의 발걸음에는 알 수 없는 깊이가 더했다.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 의천은 개경에 있는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송나라에서 수집해 온 3천 권의 교장을 간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때로는 직접 사찰 순례에 나서고, 또 때로는 송나라와 요나라에까지 사람을 보내 누락된 교장을 구해오는 열의를 보이는 등 10년에 걸쳐 이뤄진 사업을 통해 간행된 교장만 모두 4천 권에 달했다.

의천이 간행한 교장 총록은 중국과 거란과 신라, 고려에서 저술된 불교 전석들을 모두 모아서 하나의 총서 형태로 간행한 것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한자로 경전을 번역한 불교권으로 대승 불교권의 불교문화를 총 정리하는 문화 사업이다. 동아시아 불교를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대장경 간행보다 더 큰 문화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업이었다.


천태종 개창

의천이 송나라에 갔던 또 하나의 목적은 ‘천태종의 개창’이다. 의천이 주도한 천태종 개창은 단순한 종단의 개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불교는 법상종과 화엄종, 선종 3개 세력으로 대변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태종을 개창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화엄종 세력과 선종 세력을 결합시켜서 제3의 종단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교단 주도력이 위축될까 염려했던 법상종 계열 승려들의 반발로 의천은 해인사로 쫓겨나는 위기까지 겪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숙종에 이르러서야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의천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인 ‘국청사’의 건립과 함께 선종 승려 천여 명이 옮겨오는 등 천태종의 화려한 개창 앞에 섰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불교 종파의 개창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고려불교사는 신라 말기 선종이 들어온 이래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계속돼왔고, 바로 고려불교사의 역사적 과제는 선종과 교종을 어떻게 통합하느냐하는 문제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비록 간접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는 시도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다.


주전건의 상소문

의천은 주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의 상소문으로 ‘주전건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는 의천의 해박한 화폐 이론은 송나라에서의 체험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이를테면 거래하기에 편리하다는 점, 교환 수단으로써 그 다음에 가치 저장 기능상 물품 화폐를 쓸 때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점들, 그 다음에 국가 재정 운영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들을 이론적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이런 대각국사 의천의 화폐론은 우리 역사에서 기록상 확인되는 최초의 것이고, 또 굉장히 체계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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