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강화 천도, 그 참 의미를 말하다

2009-12-05

강화 천도, 그 참 의미를 말하다
최고의 군사 요새, 강화도

강화도는 중부 서해안의 작은 섬으로 1231년 몽골의 침입을 받은 뒤 무려 40년 동안 고려의 수도였다. 강화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경기만에서도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로 연결되는 모든 물류망이 모이고 당시 수도 개경으로 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섬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도 쉽지 않았다. 섬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육지랑 연결된 곳은 짧은 수로로 연결돼 있지만 나머지 북쪽이나 서쪽, 남쪽은 해안선이 굉장히 복잡하고 황해바다와 직결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세력이 강화도로 공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점 때문에 강화도는 임시 수도로서 아주 적합했다.

하지만 강화도의 이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강화도는 위아래로 매우 강하게 전체 물 형태가 이동이 많이 발생되는 지역이라 배를 운항할 때 배와 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는 지역이다. 이 때문에 섬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장기전을 대비한 고려군의 준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궁궐을 둘러 싼 내성 주위로 중성을 쌓고, 바다와 인접한 해안가에는 다시 외성을 세워 견고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800년 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는 무신정권이 만들어 낸 최고의 군사 요새였다.


강화도 공격은 하지 않은 몽골, 왜?

몽골은 해상 전투에는 능숙하지 못했을 거라고 알려져 있는 유목 민족이지만 1274년, 1281년 2번에 걸쳐 바다 건너 일본 원정길에 올랐다. 몽골에는 또 다른 협력군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이다. 몽골의 요구를 받은 고려가 연합군으로 참여해 몽골은 2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을 시도했고, 정복한 나라의 군사와 물자를 이용했다. 몽골은 고려와의 전쟁에도 거란과 여진 등 정복국의 군사들을 대거 참여시켰다. 그중에서도 여진은 해전에 능해 강화도 침공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되고 있다. 당시 몽골의 동아시아 정벌 계획에서 주공격 목표는 금나라와 송나라로 몽골의 고려 침략은 남송이나 금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의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몽골이 주 전선을 고려로 삼고 전면적으로 공격했다면 강화도를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몽골군이 수전이 약하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강화도와 육지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고, 많은 병력과 함선을 동원한다면 외곽공격을 통해 강화도를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로 봐서는 고려가 주전선이 아니었고 고려의 항전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원나라 입장에서는 이미 산재돼 있는 고려 내부의 문제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강화도를 오랫동안 놔둔 것이다. 즉, 고려의 무신정권을 극단으로 압박해 자칫 남송이나 일본과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않을까 하는 전세 역전에 대한 우려와 동아시아 전체 패권을 잡기 위한 몽골군의 전술적 판단이 강화도의 침공을 저지했던 것이다.


강화 천도의 진짜 이유는?

강화도 천도 논의가 시작될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는 왕을 위협해 가면서까지 단호히 강화 천도를 단행했다. 1231년 첫 침략 이후, 30년 동안 몽골군이 일으킨 전쟁은 총 6차례이다. 하지만 1차 전쟁을 제외하고 고려의 중앙 군대는 한 번도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몽골군과의 항전은 고스란히 남은 백성들의 몫이 되었다.

반면 국가의 공병이면서 동시에 무신정권의 군사기반이나 다름없던 군대 ‘삼별초’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증강되는 상황이었다. 항복도 않고 결사항전도 않는 무신정권을 위해 고려의 모든 군사력이 그저 방어 태세만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무신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타협조차 할 수 없었고, 게다가 이들의 안일한 항전 정신은 강화도에서의 사치스런 생활과 맞물려 더욱 가관을 자아냈다고 전해진다. 무신정권은 연회 비용의 충당을 위해 전쟁 중에도 무리한 세금을 거두는 등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대가로 30년 가까이 계속해 배를 불리고 있었다.


막 내린 무인정권 시대

1231년 처음 고려를 침공해 전쟁을 이어온 지 30여 년이 지나고 몽골의 전략 전술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몽골은 기존의 ‘초토화 전술’을 버리고 장기전에 유리한 방식으로 전략 수정을 감행했는데 고려 연안 섬 지방에 대한 공세는 그 변화의 일부분이었다. 또한 몽골은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로’를 차단하고 서서히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본토에 대한 공세도 계속해 갔다. 이에 전쟁에 지친 백성들이 세금을 걷으러 온 관리를 죽이고 몽골군에 스스로 투항하면서 항전의 정신은 몹시 희미해지고 있었다. 1258년에는 전쟁을 고집하던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암살되고, 결국 강화 천도 29년 만에 무신정권이 먼저 몽골에게 손을 내밀었다. ‘간접 통치 전략’으로 우회한 몽골은 고려의 강화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태자 ‘왕전’은 당시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을 만나 강화를 성립시키고 후에 ‘원종’으로 즉위해 강화도에 남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1270년 5월 마침내 개경 환도를 선언했다. 이후 몽골군은 강화도에 들어가 남은 성과 궁궐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40년에 이르는 강화도 무인정권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