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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로운 개혁가, 신돈의 꿈

2010-01-02

자유로운 개혁가, 신돈의 꿈
개혁을 열망하다

1270년 고려를 침략한 이후 80여 년간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 '정동행성' 등의 기구까지 설치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대토지, 대농장을 소유한 특권층이 호화로운 삶을 누리는 반면 일반 백성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더해 과도한 노역과 군역으로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에 공민왕은 귀족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러던 중 신돈을 만나 고려 개혁에 대한 뜨거운 의지를 보였다.


신돈의 등장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돈의 어머니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절에서 노비일을 했다고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신돈의 출신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다만 당시 영향력 있는 호족이었던 영산 신씨 종가집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불교계 주류 세력에 편입되진 않은 상태로 신돈은 학연, 지연, 혈연 등 모든 세속적인 굴레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이렇게 신돈의 거칠 것 없는 신분은 공민왕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족에서부터 그들과 야합했던 신진세력은 물론 일반 관리까지 당시 모든 세력을 불신했던 공민왕에게 오히려 최고의 장점으로 부각된 것이다. 또한 신돈에 대한 불만 세력을 염려했던 공민왕은 처음부터 고려 최고의 권력을 신돈에게 주고자 했다. 고려 말 당시 최고 관직인 '영도첨의사사'에서 '감찰사사', 불교계 최고의 자리인 '제조승록사사', '서운관사'등 신돈에게 여러 분야의 직함을 부여했다.


신돈의 개혁 정치

신돈은 집권과 동시에 개각부터 단행하며 제일 먼저 '무장세력 해체작업'에 집중했다. 병권 장악과 인적청산으로 기반을 닦은 신돈은 핵심 개혁 정책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돌려주며 억울한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들은 양인들을 노비로 잡고 있는 권문세적들을 겨냥한 것이다. 당시 신돈의 개혁 속도는 내정간섭 중이었던 원나라조차 고려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신돈은 이어 '성균관 중수'를 서둘렀다.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신진세력 배출과 동시에 문벌 학벌이 결합돼 이전의 구 권문세족을 밀어내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국왕이 직접 합격자를 뽑게 하는 정책까지 더해 연고주의는 해체되고 진짜 신진세력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신돈에 의해 발탁되고 함께 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신진세력 중에는 정몽주, 정도전, 이색 등 고려 왕조의 충신이나 조선 왕조의 건설 주역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개혁의 치명적 약점

신돈의 개혁 정책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나고 공민왕은 안팎으로 심각한 압력에 시달렸다. 일찍부터 고려 내정에 간섭할 뜻을 밝혀 온 명나라가 밖에 있고, 안에서는 신돈 개혁정책에 반기를 든 권문세족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돈의 개혁 정책을 환영했던 백성들조차 신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여기에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까지 형성되니 신돈 또한 궁지에 몰린 형편이었다. 신돈이 궁지에 몰린 원인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신돈의 정계 진출 6년 째 되던 해 반역 모의 혐의로 귀양을 떠난 신돈은 공민왕의 명에 의해 귀양 이틀 만에 처형을 당했다. 처음부터 속하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이 가능했지만 또 속하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개혁 지원 또한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신돈의 개혁 정신이 다음 왕조인 조선에 이어져 백성을 위한 개혁에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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