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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개혁군주 광해군! 그가 폐주가 된 이유는?

2010-03-06

광해군, 왕이 되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구의 기세에 평양까지 피신한 조정에선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심한다. 선조는 피난처인 평양에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조정을 둘로 나눠 왕세자에게 절반의 통치를 맡기기에 이르렀다. 선조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떠나자 버림받은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는데, 이때 악화된 민심을 진정시킨 이가 바로 광해군이다. 임시 조정인 분조를 이끌고 전국의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휘하며 의병들의 항전의지를 북돋았던 광해군은 전쟁이 끝나자 나라 안팎에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

선조가 별다른 역할을 못한데 비해 광해군은 분조 활동을 기대 이상으로 잘해냈다. 이는 처음에 첩자, 차자로만 봤던 백성이나 관료들이 그를 왕세자로 인정하는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광해군이 전쟁 속에서 보여준 능력은 명나라의 인정까지 받았다. 하지만 선조의 무능함이 세상에 알려지고 왕세자인 광해군의 업적만 부각되는 분위기 속에서 광해군의 선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선조 39년에 정실부인인 계비가 아들을 낳으면서 후궁소생인 광해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광해군의 개혁정책

즉위 초, 광해군이 가장 고심한 일은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 일로 국가 위기에 처한 조선을 재건하는 일만큼 시급한 일은 없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특산품으로 내던 공물을 쌀로 대신한다는 ‘대동법’을 실시했다. 하지만 많은 땅을 가진 양반 지주들의 부담은 커지고 소작농들의 부담은 줄어들면서 당연히 지배계층의 반발이 생겼다. 이 외에도 광해군의 계속해서 개혁을 했지만 양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쳐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게다가 신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탓에 실권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당시 광해군의 유일한 지지기반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광해군을 도왔던 ‘북인 세력’ 중심의 인물들이다. 이른바 ‘대북파’로 불리어지는 이들 북인 세력들은 과해군의 개혁 정치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힘을 보태곤 했다.

하지만 1613년,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광해군의 배 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이 배후의 인물로 거론된 역모사건이 터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영창대군은 목숨을 잃고 주동자로 몰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비롯해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거 처벌을 받게 되었다. 북인 중에서도 대북 세력이 매우 강하게 관철되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대북독주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인목대비의 폐위를 놓고 대북파와 갈등 겪게 되었다. 개혁을 위해 손잡았던 대신들이 어느새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북파! 광해군을 위협하다

개혁을 같이 하자는 처음 시도는 좋았으나 점차 갈등이 커지던 광해군과 대북파는 결국 또 하나의 사건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고, 조선 또한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1618년 새로 등장한 나라 후금의 공격을 받자 조선에까지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왜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파병을 보낸다면 후금의 누루하치의 원한을 사게 되고, 침략을 받을 경우에는 자신이 추구하던 복구정책이나 왕권 강화 정책들이 방해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명나라의 요구를 가능하면 거부하려고 최후의 순간까지 시도했다. 그러다 광해 11년에 마지못해 조선군 사령관 강홍립 장군을 필두로 만 여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하지만 강홍립 장군은 누구보다 광해군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전쟁도 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면서 명나라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참전했으며 후금과는 싸울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이에 후금에서도 조선과 화해를 맺는 등 조선과 후금의 충돌을 막아내는 완충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강홍립을 통해 얻는 정보로 현실적인 전략을 세우는 광해군과 달리 대신들은 패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명의 파병 요청에 순응하고자 했다. 명분을 따르고자 했던 대신들과 실리를 따지고자 했던 광해군의 충돌을 계속되었고, 대북파 대신들조차 광해군의 외교 태도를 인정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개혁군주 광해군

1623년 광해 15년에 서인 일파가 주축이 된 반정세력은 광해군의 폐위시키고 후에 인종이 되는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폐위된 광해군의 죄명은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인 죄’이다. 하지만 반정세력들이 내세운 쿠데타의 명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명나라 파병에 불응하고 후금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가시덤불로 뒤덮인 집에 위리안치 시켰다.

제주도에서 광해군이 19년간 유배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인조와 서인정권은 후금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했는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호란을 거쳐 결국에는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에 굴욕적인 군신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경험만 보아도 광해군의 외교정책이 얼마나 현명했는지 알 수 있다.

인종반정 공신들은 광해군을 쫓겨난 군주란 뜻의 ‘폐주’, 어지러운 군주, 어리석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군주란 뜻의‘혼군’ 등으로 불렀다. 이렇게 광해군의 기록은 실록이라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광해군일기로 격하되는 등 광해군의 기록은 숱하게 지워지고 다시 쓰였다. 이는 당시 광해군의 개혁 정치와 실리 정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한 구실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명분보다는 진정한 실리를 추구하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던 개혁군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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