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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이단아, 허균이 꿈꾼 세상

2010-03-13

조선의 이단아, 허균이 꿈꾼 세상
조선의 천재 문장가, 허균

1598년 조정에서는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허균을 불러 명나라 사신을 맞아 대접하는 중책을 맡기게 되었다. 허균은 원군의 일행으로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오명제에게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수백편의 조선 시를 직접 외워 소개 했는데, 오명제는 자국으로 돌아가 그 시를 바탕으로 ‘조선 시선’이라는 시집을 하나 엮게 되었다. 특히 조선 시선에는 허균이 직접 한글로 ‘음’을 달아 소개한 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조선이 훈민정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중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허균은 조선의 시인으로서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까지 높였는데, 특히 아버지 허엽과 형 허성과 허봉, 그리고 누나 허난설헌은 허균과 더불어 ‘오문장가’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 문장가 가문 출신이었다. 허균이 20대 초반에 그의 표절시가 돌아다닐 만큼 탁월했던 문장가로 신흠을 비롯하여 당대 문신들이 인정했던 최고의 실력가로 이른바 조선 최고의 천재 지성인이었다.

조선의 이단아

뛰어난 문장실력에 허균은 형조정랑, 삼척부사 등 젊은 나이게 많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그만큼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많이 했는데 그 이유가 유별나고 다양하다. 허균이 서른 한 살 되던 해 황해도사 자리에서 첫 파직 탄핵을 받았다. 당시 이유는 기생들과 너무 가까이 얽혀 있다는 것이었다. 세간의 비난에 개의치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체통과 체면을 중시했던 조선 양반 지배사회에서 그의 솔직함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허균은 사찰을 드나들며 승려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특히 사명당과 깊은 교류를 나눴는데 사명당이 열반하자 그의 비문을 쓸 정도로 사이가 깊었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이 모든 것을 통제하던 시대로 조정의 관리가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1614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내왕하면서부터는 조선에서 이단으로 취급받는 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조선 유교 사회에서 금기시했던 것들과 끝없이 가까이 하고자 했던 허균은 자신 스스로 조선의 이단아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글 최초의 소설, 홍길동전

1607년, 삼척부사에서 파직 당했다 다시 공주 목사로 부임한 허균은 부임하자마자 서자 출신의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허균은 자신의 녹봉을 들여 서자 출신의 친구는 물론 그 식솔들까지 돌봤는데, 명문가의 자손이던 허균이 서자들과 절친하게 지낸 배경에는 그의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이 컸다. 이달 역시 서자 출신으로 관직을 포기하고 전국을 떠돌았는데 허균의 이달의 사상을 배우면서 조선시대가 갖고 있던 서얼금고법에 의해 인재가 제대로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허준의 이러한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목마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서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홍길동전’이다. 허균은 소설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민중에게 있다는 ‘호민론’을 주장하며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백성임을 말했다.

허균, 개혁을 꿈꾸다

1613년, 남한강 인근 문경새재에는 ‘강변칠우’라고 불리는 7명의 고관 자제들이 모여 살았다. 재능은 있지만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벼슬에 나아갈 수 없음을 한탄하던 이들이 마침내 거사를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칠서의 난’이라 불린 이 사건의 배후로 허균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칠서의 대장이던 서양갑과 심우영은 허균과 절친했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허균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은 칠서들의 도움으로 겨우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막았으나 허균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조정의 최고 실세인 대북파 이이첨과 손을 잡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5년 후, 백성들을 위해 광해군이 제거될 것이라는 ‘흉방’이 허균의 조카였던 ‘하인준’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허균은 다시 한 번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되었다. 정확한 진상 조사를 명하는 광해군을 거슬러 하루 속히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을 처형하라는 대신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이에 허균을 옹호하는 백성들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허균의 사형 집행은 정식 재판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시 허균처럼 개혁을 꿈꾼 사람들도 많았지만 허균처럼 실천에 옮겼던 사람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신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개혁을 추구했던 허균의 행보는 조선의 개혁에 밑바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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