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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2010-03-20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선비 곽재우! 칼을 잡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선비 곽재우가 처음으로 칼을 잡았다. 군사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 친 관리를 직접 처단하겠다고 나섰지만 곽재우의 원래 본 모습은 선비였다. 곽재우는 어린 시절 일찌감치 시작한 공부로 그의 학식은 이미 높은 수준이었다. 과거에서 2등으로 합격했지만 선조의 시정을 비판하는 '당태종조사전정론'이라는 글로 인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취소가 되었다.

또한 당파 싸움으로 분분했던 16세기 후반, 곽재우는 되도록 정치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붕당 정치의 결과로 아무런 대비 없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라를 구해야 할 수령들이 제일 먼저 자취를 감추자 곽재우는 분노했다. 그리고 1592년 4월 2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을 일으켰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학자로 평소 누구보다 실천을 중시한 학자였다. 조식은 내면의 수양을 통해 외부 모순이 생긴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해야 하는 것이 참선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성선자'라는 방울을 수양의 의미로 차고 다니고 칼을 항상 몸에 지니면서 외부적인 모순이 있을 때 과감하게 칼처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사위로 늘 병서를 함께 공부하라 강조하며 학문과 무예를 동시에 연마했다. 게다가 당시 재산이 몇 만금이나 될 정도로 이름난 부호였다.

붉은 옷에 흰 백마를 탄 홍의장군, 곽재우
곽재우는 많은 재산을 전부 의병 활동에 내놓으면서 직접 의병 모집에 나섰고, 그런 곽재우의 모습을 보고 의병들이 믿고 따르며 조금씩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에서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곽재우가 변변치 못한 병사를 이끌고도 11척의 왜선을 포획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선조는 '형조정랑'의 관직을 하사하려 했다. 하지만 곽재우는 관직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옷을 벗어 의병에서 입혀줬다. 이런 태도에 의병의 군세는 급격히 늘어나 곽재우가 낙동강 일대의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곽재우는 10여 명의 장수들에게 자신과 같은 홍의를 입히고 전장을 누비게 하는 등 탁월한 게릴라전으로 왜적들의 내륙 진격의 요충지였던 정암진에서 큰 승전보를 울렸다. 이 전투는 육지에서 왜군에게 처음을 큰 피해를 입힌 전투로 조선의 관군이 아니라 의병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곽재우가 정암진을 지킴으로 해서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을 막아 경상도를 보존할 막았기 때문에 경상우도 지역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후 곽재우의 이름이 널리 퍼지면서 경상도의 오른쪽 지역이었던 경상우도는 왜군들도 넘볼 수 없는 곳이 됐다.

빛나는 성과 뒤에 따라 온 난관
당시엔 관군도 조정도 의병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전쟁으로 피폐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급기야 폭동으로 번지자,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의연히 일어선 의병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낸 것이다. 특히 왜란 초기에 당시 경상감사였던 김수는 전쟁이 발발하자 각 고을에 왜군을 피하라 이르면서 제일 먼저 도망했다. 또한 의병들마저 흩어지게 하는 우를 범해 곽재우의 노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김수는 궁주에 몰리자 오히려 곽재우를 병기 도둑으로 몰아 역적 곽재우라는 모략을 일삼았다. 또한 조정에서 파견한 감사를 죽이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이자 선조는 나중에 왕이 잘못했을 때도 뭔가 대응할 것 같은 위험인물이라고 인식했다.

곽재우에게 불리했던 <의병장 대 경상감사>의 싸움은 다행히 초유사 김성일의 중재로 무사히 무마되는 듯 했다. 하지만 1596년 이몽학의 난이 발생했다. 다행히 난은 평정되었지만 민란의 주모자로 의병장 김덕령과 홍계남, 곽재우가 모함을 받게 되었다. 신출귀몰한 신장 김덕령 충용장의 위세는 당시 선조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갔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그 위협은 오히려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곽재우와 홍계남은 곧 혐의가 풀렸으나, 의병장 총수였던 김덕령은 결국 20일간의 고문 끝에 세상을 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곽재우도 생업으로 돌아갔다. 전란을 수습하고 왜의 재침략에 대비해야 할 시기에 곽재우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지금의 울산 왜성인 도산성 수비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서를 내고 4개월 만에 임지를 떠났다. 곽재우는 이 일로 영암에서 2년 간 유배를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상을 잊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호를 '망우정'으로 짓고 은둔을 이어간 곽재우는 24년간 29번의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매번 거절하거나 바로 사직하기를 반복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이룰 수 없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사회는 국가나 민족의 공익보다 당파 이익을 중시하는 사리사욕의 측면이 강했다. 당파적 갈등이 첨예할수록 자기 입장이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곽재우에는 거기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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