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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궁녀에서 왕비, 그리고 사약을 받기까지! 비운의 여인, 장희빈

2010-03-27

궁녀에서 왕비, 그리고 사약을 받기까지! 비운의 여인, 장희빈
풍족한 역관 집안 가문의 딸, 장옥정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으로 '인동 장씨' 집안의 2남 2녀 가운데 막내였다. 장씨 집안은 16세기 후반 조선 시대 중간 계급이었던 중인 가문 출신으로 수석 합격생 7명을 비롯해 총 20여명의 역관을 배출했다. 특히 옥정의 아버지 장경과 할아버지 장응인은 모두 지금의 외국어 통역담당관인 역관을 지낸 관리로 장응인은 탐욕스런 청나라 사신들이 오더라도 감히 뇌물을 요구할 수 없을 만큼 공명정대했던 역관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장경의 이른 죽음으로 옥정 일가는 5촌 당숙인 장현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현 역시 당시 이름난 역관 중 한 사람으로 청나라를 오가는 사신 행렬 명단에는 으레 장현의 이름이 올랐다. 또한 나라에서 지급한 물품으로 사행 경비를 충당하는 권한은 물론, 개인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쥐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사들인 물건을 다시 일본에 되파는 등 역관들이 얻는 실제 차익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장현은 40여 년 간 청나라를 30여 차례나 오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지만 조정의 제재는커녕 오히려 외교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종1품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장옥정은 그야말로 당대 손꼽히는 풍족한 집안의 딸이었다.

장옥정, 궁녀가 되다!
1680년 이른바 '삼복의 변'이라 불리는 역모 사건을 계기로 숙종 즉위 6년 만에,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남인 세력이 대거 제거되고, 서인들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원래는 남인과 서인들이 60대 40으로 정권을 분담하는 분당정치체제였으나 이로 인해 일당전체정치로 바뀌었다. 이른바 환국정치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평소 남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역관 장현 역시 함경도로 유배를 떠났고, 옥정도 처음 궁 안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장옥정은 '숙종실록’에 따로 기록이 남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미모에 남인들의 힘이 더해서 입궁 몇 달 만에 숙종의 승은을 입는데 성공했다. 실제 남인들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감지가 되었다. 자위대비가 주선해서 숙종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숙종의 총애를 손쉽게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남인들이 정권 탈환의 일환으로 장옥정은 궁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숙종의 첫 번째 비인 ‘인경왕후’가 세상을 뜨자, 서인파는 서인가의 여인인 인현왕후와의 혼례를 준비했고, 이로서 서인의 상징인 인현왕후와 남인의 상징인 옥정의 모진 인연이 서막을 열게 된 것이다.

조선 최초로 궁녀에서 왕비가 된 장희빈
집권당인 서인 세력의 끊임없는 비방으로 궁녀 장옥정의 입지는 상당히 불리했다. 그러나 1688년, 옥정이 왕자를 출산하면서 전세는 한 순간에 뒤바뀌었다. 왕자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원자 책봉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고, 서인 세력의 반대 속에서도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옥정은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올린 반대 상소가 또 한 번 숙종의 뜻을 거슬렀다. 이에 숙종은 송시열은 물론 전 서인들을 숙청했고, 경신환국 이후 9년 만에 다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른바 기사환국의 마지막 절차로 인현왕후마저 궐 밖으로 폐출되었다. 숙종은 인현왕후 폐출 열흘 만에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했고, 이로서 장희빈은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한 궁녀 출신의 왕비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신분 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중인 출산의 여인이 왕비에 오르는 일이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장희빈이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중인들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의 막강 세력으로 부상한 중인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인 상평통보가 다시 주조되고 청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를 통해 상업이 번성하던 17세기 말,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중인들은 당시 정치권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역관이었다. 역관들은 나라 안팎의 정보를 관장하고 외교를 관장함으로써 왕위 계승이나 모든 일에 관계가 되어 있었다.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자금을 관리했기 때문에 자연히 정치인과도 가깝게 지냈다. 전문적인 능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었던 중인 계층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 스스로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당시 서인과 남인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중인들의 힘을 빌리고 있을 정도로 중인의 힘은 막강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집권한 지 4년 째 되던 해, '환국 도모 혐의'로 대거 처벌을 받게 된 자들 중에는 서인들뿐만 아니라 중인 계층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남인들이 세력을 잡고 장희빈을 왕비로 만든 기사환국뿐 아니라 서인들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되는 갑술환국에서도 중인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장희빈은 죽음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룬 숙종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자 숙종은 폐출됐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옥정을 빈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장희빈은 숙종에게서 잊혀졌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갑작스런 죽음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한때 그토록 총애했던 장희빈에게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은 자신이 사망하고 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 장희빈이 남인들과 결탁해 또 다시 서인 정권을 갈아치우고 남인 정권이 들어설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숙종은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해 누구보다 대신들의 힘에 억눌려 왕권 강화에 남다른 뜻을 갖고 있었다. 결국 장희빈은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숙종의 의지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숙종은 그 대가로 얻은 강력한 왕권을 통해 마침내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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