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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암행어사 박문수! 희망을 쏘다

2010-04-10

암행어사 박문수! 희망을 쏘다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
1691년, 고령 박씨 소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박문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평소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사는 어머니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박문수는 33살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 4년 후 비로소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암행어사는 왕과 가장 가까우면서 동시에 강명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되고 또한 심의에 숙달된 사람으로 일정한 일에 경험을 가진 사람을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다. 박문수는 왕의 두터운 신임 속에 당시 영남의 어사로 암행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가짜 어사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로 어사의 임무는 극히 위험했다. 하지만 박문수는 변장의 명수로 기록될 정도로 변장술이 뛰어났다.

평소 박문수는 탐관징계법을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가난한 선비로 변장해 수령들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고 가차 없이 처벌했다. 홍수와 가뭄으로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마을에서는 자신이 가진 곡식마저 모두 내놓는 등 백성을 위한 선정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암행어사였다.

또한 굶주린 백성을 위해 조정의 대신들도 가진 곡식을 같이 나눠야 한다는 청을 올렸는데, 대부분의 대신들은 쓴웃음으로 일관하며 오히려 반대 상소를 올렸다. 게다가 노론 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던 당시에 소론파였던 박문수는 정치적으로도 적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박문수가 작성한 상소를 통해 삼남지방의 극심한 기근 상황을 통보 받은 영조는 대신들의 비난 속에도 박문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외에도 박문수는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며 백성들을 안심시킨 공으로 본무공신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파격 인사를 거듭했다. 또한 다른 지방에서 들려온 재해 소식에 자신의 관할 지역 곳간을 제일 먼저 열어 보내는 등 소신 있는 선택을 거듭했다. 제 실속 차리기에 급급했던 관리들 틈에서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던 관리가 바로 박문수였다.

백성을 위한 정치
박문수는 암행어사로서 한 일보다 다른 벼슬에서 남긴 업적들이 더 많았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은 나날이 증가하는 세금이었다. 그중에서도 일반 성인 남자들에게 부여된 군역의 의무는 무리한 군포 납부로 이어지면서 가족 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하는 일이 엄히 금지되면서 수령들이 처벌받는 일은 줄어들고, 오히려 이중삼중으로 세금을 수탈당하는 백성들만 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때 박문수의 건의를 시작으로 군역 문제 논의가 거듭되자 영조는 군포를 반으로 줄이는 균역법을 단행했다. 그러나 박문수는 계속되는 폐단을 막기 위해 양반지주들도 세금을 내야함은 물론, 권세가에게 바쳐지던 어염세마저 국가 수입으로 돌리자는 주장을 했다.

노론 대신들은 박문수가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을 거듭하자 박문수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더욱 거세게 인신공격을 감행했다. 박문수가 백성들의 돈 수만 냥을 횡령했다는 죄명으로 모함했고, 박문수는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문수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인 영조
궁지에 몰린 박문수를 구한 것은 결국 영조였다. 옥에 갇힌 지 한 달 여 만에 박문수의 혐의를 풀어 준 영조는 박문수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항상 그의 편이 되어주고, 박문수도 영조에게는 늘 당당했다. 대신들은 박문수의 거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나섰지만, 영조는 박문수의 진심을 알고 늘 그를 곁에 두려 애썼다. 영조는 조정의 예산을 절약하기 위해 실시한 탁지정례 편찬 등 여러 차례 박문수의 공을 치하하며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영조 31년, 소론이 주도한 역적모의가 발각되면서 박문수 또한 역적으로 거론되었다. 박문수는 자신을 제거하고자 다짐한 노론들의 기세에 밀려, 영조 앞에서 심문을 당하는 모욕을 당하게 되었고, 마침내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며 은둔 1년 만에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역적으로 몰리며 생을 마감했지만 박명수는 훗날 영조실록을 편찬한 노론조차 인정할 만큼 열정을 갖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던 인물이다.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박문수는 영의정에 추증됐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암행어사 박문수를 이야기하는 것도 박문수는 백성을 위한 진정한 정치를 보여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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