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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춤추는 조선을 꿈꾼 왕세자 효명

2010-04-17

춤추는 조선을 꿈꾼 왕세자 효명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1827년 순조 27년 되던 해, 순조는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희미해진 왕권이 추락을 거듭하자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왕권 강화라는 사명을 받아들고 대리청정에 나선지 두 해째 되던 1828년 11월, 효명세자는 순조 재위 30년과 보령 40세를 맞아 잔치를 기획했다.

효명세자는 대신들의 업무 분담은 물론 잔치에 들어갈 무용과 무대 연출까지 잔치의 총감독으로 나섰다. 효명세자는 당대 내로라하는 기녀들과 함께 당시 궁중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던 장악원에서 옛 가무를 복원함을 물론 '춘앵전'과 '무산향' 등 총 26편의 파격적인 궁중무용을 직접 창작해 선보였다. 그리고 궁 안에서 시작된 예행연습의 지휘 역시 효명세자가 직접 나섰다. 효명세자의 이런 모습에 보수파 대신들의 질책이 이어졌지만 효명세자는 오히려 자신의 의도를 왜곡한 대신을 유배시키면서까지 연회 전 과정을 꼼꼼히 챙겼다. 효명세자에게 연회는 부왕의 생신잔치,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왕권강화를 위한 효명세자의 선택 1. 예악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뒤를 이어, 나이 11살에 왕이 되었다. 어린 순조 대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고, 정순왕후가 세상을 뜨자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중심의 안동 김씨가 국정을 장악했다. 여기에 순조 9년, 극심한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성들조차 국왕을 믿고 따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화병까지 얻은 순조는 1809년, 마침내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할아버지 정조의 학구파적 기질을 쏙 빼닮은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의 호위 아래, 차근차근 왕세자로서의 위상을 확인해 갔다. 그리고 순조는 38살에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시작하자마자 효명은 '예'로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 '음악'으로 백성을 화합하겠다는 뜻의, 이른바 '예악 정치'로의 행로를 밝혔다.

대리청정 첫해 연회를 시작으로 대리청정 3년간, 크고 작은 연회가 총 11번이었다. 대부분 부왕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였다고는 하지만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궁중 연희는 남다른 의미를 내포한 자리였다. 연회는 잔치에 참석한 유력 대신들이 왕에게 다시 한 번 충성을 서약했던 자리이며, 만수무강을 비는 치사를 낭독했던 자리였다. 그리고 잔치를 통해 왕의 위엄과 권위를 내보이고 군신의 질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효명세자는 잔치 바로 다음 날 '익일회작'이라는 자리를 열어, 또 한 번 군신들을 불러 모았다. 익일회작은 효명세자의 장인인 조만영을 비롯해 반외척 세력이 모두 참석해 정치 회합 이상의 성격을 띤 자리로 단순히 수고한 관원들을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왕세자로서의 위상과 왕세자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자리였다.

왕권강화를 위한 효명세자의 선택 2. 안동 김씨 세력의 축출
효명이 대리청정에 나서자마자 시작한 또 하나의 일은, 바로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는 일이었다. 특히 김조순 권력의 중심이었던 비변사 당상들이 전부 감봉 조치 당한 일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남인, 소론 등 반 외척 세력들을 정계로 복귀시켜 외척 세력 인물들의 비리가 연일 폭로되고 탄핵에 이르렀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4개월 만에, 안동 김씨 세력의 핵심 인사들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효명은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를 혁파하고 과거를 자주 실시해, 전국 각지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애쓰기도 했다. 직접 궁 밖을 나가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도 했는데 그때 우연히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를 만났다. 박규수는 효명세자에게 실학과 이용후생이라는 북학사상의 진수를 전하기도 했다.

조선의 왕도 정치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효명세자의 정치에 기대를 거는 이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효명세자는 19살에 대리청정을 시작해 22살에 독살 의혹 속에 생을 마감했다. 군신의 관계를 넘어 효명과 조선의 개력을 꿈꿨던 박규수는 효명세자가 죽자 20년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며 그를 기렸다고 한다. 뛰어난 개혁가에 또 정치가로, 조선을 깨우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효명세자, 그는 춤을 사랑하고 조선을 사랑한 왕세자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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