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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매국노 이완용의 행적을 찾다!

2010-04-24

매국노 이완용의 행적을 찾다!
매국노의 대명사
매국노의 대명사라 불리는 이완용은 최초의 국립 영어 교육기관 육영공원 출신이자 초대 주미공사관 참찬관을 거쳐 대리공사에 올랐고, 친미파의 수장으로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사대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고, 독립문 현판이 그의 필적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하지만 이완용은 영어를 잘 구사한 대신 정작 일본어는 하지 못했다. 이완용의 이력을 살펴보면 통역을 대동해 의사소통을 하고 이토 히로부미처럼 영국 유학파 정치가와는 영어로 이야기하는 등 일본어를 배울만한 시간이나 기회가 없었다.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1858년 경기도 광주, 우봉 이씨 집안의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0살 때 집안의 먼 친척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호준은 당시 벼슬이 예방승지였고 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이었다. 이호준은 대원군 집권 후 40대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10여 년 동안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완용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이호준은 이조 판서였다. 이완용은 25살 되던 해인 1882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해 28살 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886년 29살 때 규장각 대교로 벼슬길에 나간 이후, 48살 되던 1905년까지 줄곧 친미·친러파로 활동했는데,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한 것도 친미파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완용은 처신의 달인이라고도 불린다. 1890년대까지만 해도 친미파의 수장으로 반일적인 의식을 강하게 보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은근슬쩍 친일파로 갈아탔다. 그리고 1907년 총리대신에 오른 후 강제병합 때까지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를 지켰다.

이완용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것도 탁월했다. 육영공원은 고종이 외국어 전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헐버트를 초빙해서 문을 연 학교로 현직 관리 중에 유능한 사람을 뽑아 교육시킨 좌원, 양반 고관 자제를 선발해 교육시킨 우원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완용은 당연히 좌원 학생으로 입학했는데, 다른 학생들이 수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 반해 굉장히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이 인연으로 이완용은 초대 주미공사관 참찬관에 발탁되었다.

정계의 중심인물로 도약하다
참찬관은 지금의 서기관에 해당한다. 주한 미국 공사관이 설립된 것은 1883년이었고, 초대 주미 공사관 일행이 도미한 것은 1887년으로 이처럼 공사관 설립이 늦어진 것은 조선의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이 공사관 설립을 방해한 탓이다. 초대 주미 공사는 내무 협판을 지낸 박정양이었고, 그 다음이 이완용이었다. 당시 이완용으로서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어가 출세의 바탕이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완용이 1888년 1월, 미국에 도착한 뒤 신임장을 제정한 이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4달 만에 귀국했다. 병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고, 미국 신문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조선 관리의 이상한 복장을 보고 돌멩이를 던지며 ‘쥐새끼’라 부르며 괴롭히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사 일행이 부임하기 전 청국에게 약속한 영약 3단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문책성 인사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다 그해 연말 다시 도미해 2년간 미국 대리공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귀국한 뒤 친미파 활동을 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청국이 종주권을 잃은 순간, 1894년 11월 이완용의 나이 37살 때 박정양을 수반으로 한 친미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정계의 실세로 군림했다. 1894년 이전에도 미국 세력이 약하지는 않았지만 중전 민씨를 중심으로 한 친청세력이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박정양, 이채연, 서광범 등 미국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정계를 주도한 시기였다.

독립협회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독립협회에서 독립은 일본에 대한 독립이 아니라 청국에 대한 독립이었다. 독립협회 연구자들이 의도적으로 이완용의 활동을 축소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독립협회는 이완용이 창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완용은 창립총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회장까지 지냈다.

매국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이완용이 친일파로서 돌변한 것은 을사늑약 체결 때이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줘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해 을사늑약 체결의 일등 공신이 된다. 외부대신인 박제순과 내부대신인 이지용, 군부대신인 이근택, 농상부대신인 권중현 등과 함께 을사5적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원래 반일파였던 이완용을 일본이 중용한 것은 일본에 대한 이완용의 충성이 확인된 이상 이완용만큼 믿고 쓸 정치가가 한국 정부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유길준, 박영효 등 원조 친일파들은 10여 년 간의 망명생활로 국내 기반이 없었고, 송병준, 이용구 등 러일전쟁 이후 등장한 일진회 세력은 신분이 미천한데다가 학식도 짧고 과격하기까지 해서 충성심 말고는 믿을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에도 이완용이 대한의 몇째 안 가는 충신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 중 일부>
대한에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혹 있는 것을 알리라. 몇 개월 전에 이완용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 한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달라 하였더니,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논이 매우 있었더라. 이완용씨가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정정당당히 정부에서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이완용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더라. 그러나, 이완용씨가 죽는 것을 두려워 아니 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량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 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 가면서라도 자기 힘껏 그 일을 방어할 량으로 하다가 필경, 일은 자기 뜻과 같이 아니 되었으나 대체 이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에 대하여 자기 직분은 하였는지라. 우리가 이완용씨를 치하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 이 일에 옳다고 치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해로운 줄을 알고, 그 해로운 일이 자기에게 위태로운 줄을 알고, 그 해로운 일이 자기에게 위태로움이 있어도 그것을 상관치 아니하고 기어이 자기 생각 껏 그 일을 못 되도록 하였으니, 이씨가 자기 몸을 돌아다보아, 나라 일을 둘째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은 가히 알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이씨를 대한에 몇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아느니라.


물론 이완용이 외국에 이권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완용이 외부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압록강, 두만강 삼림 벌채권, 경의선 철도 부설권 등 굵직굵직한 이권을 차례로 외국에 넘겨준다. 독립신문이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이완용이 독립협회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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