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매국노 이완용 암살 시도! 이재명, 그는 누구인가?

2010-05-01

매국노 이완용 암살 시도! 이재명, 그는 누구인가?
이완용 암살 시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12월 4일 일진회 한일병탄 청원으로 당시 사회는 매우 어수선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직후라 친일 대신들에 대한 경계도 삼엄했다. 하지만 이재명이 삼엄한 경계를 뚫고 이완용 암살 시도를 하며 세 군데나 찔렀다.

<1909년 12월 23일, 대한매일신보 기사 중>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어제(작일) 오전 11시, 종현 천주교당에서 설행한 비국 황태자 폐하 추도식에 참례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후좌우로 엄밀히 보호하고 교당 문 밖에서 일곱 여덟 시간 동안 되는 데 이르러서는 단발한 사람 한 명이 돌출하여 여덟 치 남짓한 한국 칼로 인력거 끄는 차부부터 질러 꺼꾸러뜨리고 몸을 소스쳐 차위에 앉은 이완용씨의 허리를 찌르매 이씨가 달아나려 하거늘 이씨의 등을 찔러서 세 군데가 중상하였는데 그 자객은 평양 사람 이재명이라 즉시 포박되었다더라.

비록 이완용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한국인들은 합방을 원치 않으며 매국노들은 언제든 처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재명! 그는 누구인가?
이재명은 평안북도 선천 태생으로 평양에서 성장했다. 1904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이주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노동, 공립협회 활동했다. 그리고 제1,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을 위해 1907년 나가사키를 거쳐 귀국했다. 그리고 1909년 이완용을 암살한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0살이었다.

이완용의 왼쪽 어깨로 들어간 칼끝은 왼쪽 폐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완용이 숨 쉴 때마다 구멍 뚫린 폐로 공기가 새어나와 폐기종을 일으킬 징후까지 보였다. 이완용은 만년에 해소병으로 고생을 하고 서식과 폐렴으로 죽게 되는데 그 원인이 이때 입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리 부분을 찔린 두 번째와 세 번째 상처도 신장 가까이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다.

이완용 암살 사건의 첫 공판은 1910년 5월 13일 열렸다. 재판과정 전체가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는데 전체 4면 중 2면이 공판 기록일 정도였다.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배후를 묻자 이재명은 '이완용을 살해한다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치 않을 자 없을 것이오. 이천만 동포 모두가 배후요.'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또한 증거물로 제시된 칼이 '행흉할 때 사용된 것이냐'는 질문에는 '행흉하는 데 쓰던 것이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는 정의를 위해 사용된 것'라 답변해 방청석을 가득 매운 방청객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5일 후인 5월 18일, 이완용 살인 미수 혐의로 이재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강제합병 이후, 이완용의 삶
이완용이 친일을 해서 대한제국 황실에 불충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선입견이다. 이완용이 입원했을 때, 고종과 순종은 매일 같이 사람을 보내 병세를 묻고, 위로금 1~2천원을 보낼 정도로 각별한 군신간의 의를 보였다. 강제병합 이후에도 이완용은 일본 천황과 조선 황실에 똑같이 충성을 보였다.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라 불렸지만 태어날 때부터 매국노는 없다.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다보면 누구나 역사에 수치스러운 이름을 남길 수 있다. 사회 지도층은 권력욕만 가질 것이 아니라 뚜렷한 역사관을 지녀야 할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