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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비에서 공주 군수로... 충청도 최고 갑부 김갑순

2010-05-08

노비에서 군수가 된 김갑순
김갑순은 본래 공주의 관노였지만 타고난 신분적 한계를 극복해 충청도 최고의 갑부가 된 인물이다. 1872년 공주에서 김현종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형이 요절해 13세에 호주가 되었다. 어머니는 공주 장터에서 국밥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공주 감영에서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그 후 29세 때까지 김갑순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고, 확인할 길 없는 몇 가지 회고담이 전해질 뿐이다. 15세에 상경해 누군가의 천거로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이용익 밑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재주를 인정받아 봉세관이 되었다고는 이야기도 있고, 어느 날 김갑순이 투전판으로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미모의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충청 감사에게 소첩으로 바치고 경찰 간부가 되었다고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구한말 <관헌 이력서>에 나타난 김갑순의 첫 벼슬은 1900년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였다. 하지만 2달 만에 의원면관되었고, 김갑순의 자필 이력서에도 빠져 있어 실제 벼슬이 아니라 허울뿐인 벼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한 달 동안 역임한 중추원 의관도 허울뿐인 벼슬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30세를 전후로 그는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은 것은 확실하다.

김갑순은 1901년 내장원 봉세관에 임명돼 첫 번째 실제 벼슬을 얻었다. 내장원은 황실의 재정을 총괄하던 기관이었고, 봉세관은 지방에 파견돼 세금 징수를 독려하던 관직이었다. 세금을 만지다 보니 검은 돈을 축적할 기회도 늘어났다. 김갑순은 봉세관으로 근무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부여 군수 실함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게걸스럽게 검은 돈을 축적했다.

1902년 부여군수에 임명된 후 1911년까지 김갑순은 논산시 노성면과 부여군 임천면, 공주, 금화, 아산 등 6개 군 군수를 역임했다. 군수로 재직한 10년 동안 그는 가렴주구를 일삼아 거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산을 축적했다. 김갑순은 부여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상인의 쇠가죽 1000여 장을 강제로 빼앗아 내부의 감찰을 받았고, 노성 군수로 있는 동안 매부를 봉세관으로 임명해 세금을 과다 징수하다가 물의를 빚었다. 공주 군수로 재임할 때에는 일본인의 청탁으로 사유 토지를 헐값에 방매해 민원을 야기하는 등 김감순은 부임하는 곳마다 군민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한일병탄이 만들어낸 갑부
김갑순은 노비에서 관리가 되어 신분을 극복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충청도 최고의 갑부로도 유명하다. 한때는 대전 토지의 40%가 그의 소유였다고 한다. 김갑순이 갑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일병탄 때문이다. 통감부는 한일합방 조약에서 민심 회유책으로 1908년 이전의 모든 지세, 1909년 이전에 빌려준 모든 사환미를 탕감한다고 공표했다. 탕감액은 무려 400만원에 달했다. 당시 지방 관리들은 지세와 사환미를 징수하고도 중앙 정부에 납부하지 않고 유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통감부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탕감령을 내린 것이지만, 정작 그 혜택은 전국 4300여 명의 군수들에게 돌아간 셈이었다.
김갑순은 아산 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독직 사건에 연루돼 삭탈관직 될 위기에 처했지만 한일병탄을 계기로 면죄부를 받았다. 그와 더불어 체불 국세 탕감령으로 유용한 지세와 사환미를 합법적으로 착복하는 행운도 누렸다. 아산 군수를 끝으로 고향인 공주로 돌아왔을 때 김갑순은 충청도에서 손꼽히는 거부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로는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재산을 불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구상했다.

재산 축적을 위한 다양한 사업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대전의 토지였다. 1905년 경부선 간이역이 들어설 때만 해도 대전은 한밭이라 불리던 상주인구 180여 명에 불과한 한미한 시골 마을이었다. 대전은 1914년 호남선이 그곳을 기점으로 이어지고 난 이후에야 교통의 요지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권력자들과 친분을 이용해 대전이 호남선 기점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빼낸 김갑순은 대전 시가지로 개발될 토지를 닥치는 대로 매집했다. 식산은행에서 연리 5%의 저리로 90만원을 대출받았고, 지방 부호들의 돈도 끌어들였다. 부호들은 공주에서 가장 큰 집에서 살고, 권력자들과 친분도 돈독한 김갑순에게 안심하고 돈을 맡겼다. 김갑순은 남의 돈으로 헐값에 대전 토지 22만 평을 쓸어 담았고 대전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토지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황무지와 다름없던 대전 토지는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김갑순은 대전 토지 가치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관료들을 상대로 충남 도청 이전 로비를 벌였다. 도청을 비롯한 관공서 부지를 무상으로 헌납하기로 약속한 끝에 1932년, 기어이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시켰다. 경부선 개통 이전 평당 1~2전 하던 대전 토지는 도청 이전 이후 100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30여년 만에 1만 배 폭등한 셈이었다. 이로 인해 충청도 지방 부호였던 그는 일약 전국적인 부호로 떠올랐다.

김갑순에게는 대전 토지 외에도 공주, 예산 일대에 1000만 평의 토지가 있었는데 특히 공주와 대전에서는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돌아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만 30~40명, 소작인은 수만 명에 달했고, 매년 3만 석 정도의 추수를 얻었다. 김갑순은 땅 사업 외에도 다른 사업도 벌였다. 공주-대전, 공주-천안간 자동차 운송업과 대전극장과 공주 금강관 등 영화관을 경영했다. 공주 읍내에 시장을 조성해 200여 점포를 임대했고, 유성온천주식회사를 설립해 유성 온천을 개발했다. 일본어로 간행된 전국지 조선신문사를 인수해 경영하기도 했다.

해방 후, 김갑순의 행적
김갑순은 해방 후에 반민 특위에 체포돼 공주 출신 제헌국회의원 김명동에게 신문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김명동에게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두 아들과 장손을 각각 지역구를 달리해 출마시켰지만 엄청난 선거비용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낙선했다. 이로 인해 농지 개혁 과정에 그의 토지는 대부분 유상 몰수돼 흩어졌다.

부호로서 김갑순의 명성은 해방 이후 조금씩 퇴색했지만, 1960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사후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의 유산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는 갖은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재산을 불려나갈 줄만 알았을 뿐, 어지간한 외압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건실한 사업체를 일으키지도, 재산을 대대로 이어나갈 후계자를 키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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