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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2010-05-15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고종은 공식적으로 6명의 부인으로부터 8남 2녀를 보았지만, 대부분 어려서 죽고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3남 1녀뿐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은 고종이 46세 때 얻은 막내아들이었다.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영친왕은 그보다 20살 많은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영친왕이 황태자 책봉될 당시 나이는 겨우 11살로 미국 유학까지 마친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에 책봉된 것은 영친왕의 모친 순헌황귀비 엄씨가 명성황후 사후 황후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의친왕의 반일성향도 황태자 책봉에 반영되었다.

형을 제치고 황태자에 책봉된 것이 행운만은 아니었다. 이등박문은 황태자의 일본 유학을 요구했는데 사실 유학은 명분일 뿐, 사실상 볼모로 데러가겠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수학원(대한제국 황족‧귀족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면 될 것을 멀리 일본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냐?'고 반대했지만, 이등은 위협과 설득을 번갈아 구사하며 기어이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성사시켰다. 이등은 태자태사 자격으로 영친왕의 유학길에 동행하면서 매년 여름방학에 한 번씩 귀국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영친왕의 일본 생활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의 태자태사로 이토 히로부미가 친소자만큼 아꼈던 인물이다. 그리고 영친왕 역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을 때 상복을 입을 정도로 각별한 정을 느꼈다. 친왕은 한일병탄 이후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했는데, 이는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된 것이 아니라 일본 황제로부터 왕 작위를 받은 것이다. 이로서 영친왕은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동양의 몰락한 왕조 중 대한제국 황실만큼 후한 대접을 받은 왕조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영친왕은 볼모로 일본에 갔지만 로열패밀리 교육을 받았다. 영친왕은 1908년부터 3년간 일본 최고의 교수진으로부터 개인 교수를 받고, 1911년 1월 9일부터 8개월간 일본 황족의 교육기관에 입학해서 공부했다. 그리고 1911년 8월에는 육군 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 육군사관학교 29기로 졸업했다.

영친왕이 일본에 머무리는 동안 대한제국이 멸하면서 영친왕은 일본 장교로 임관되었다. 1917년 소위로 임관한 후, 일본 군부 내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23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38년 7월 육군 소장 진급, 1940년에는 육군 중장 진급했다. 일본 패전 당시에는 도쿄 제1항공군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친왕의 첫딸 마사코(방자)와 결혼했다.

영친왕의 또 다른 이름, 의민황태자
광복 후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해 그의 귀국을 막았다. 1947년 5월 3일, 일본 신헌법을 시행해 490개 가문에 이르는 귀족 집안의 신분상, 재산상 특권을 상실토록 했다. 영친왕은 재산평가액 960만 엔 가운데 78%에 달하는 750만 엔 세금으로 납부했다. 그리고 1947년 10월 14일에는 신적강하 이후 일본 황족에서 평민으로 강등 당했다.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해 일본 국적 상실하고, 엄청난 세금과 소득이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영친왕은 어려운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1957년 아들 이구의 MIT 졸업식 참석을 위해 요청한 여권 발급이 거부당하자 일본으로 귀화하고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리고 1963년 11월 2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내 준 전세기를 타고 반신불수의 몸으로 귀국했다. 516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대통령 선거에 영친왕을 이용하기 위해 귀국을 주선한 것이다. 그러나 영친왕은 귀국 후 뇌졸중으로 건강이 나빠져, 아들 이구 부부만 먼저 귀국했고, 영친왕은 선거 후에야 귀국하게 되었다.

영친왕은 1970년 4월 28일에 이방자 여사와 결혼 50주년 금혼식을 하고 사흘 후 낙선재로 옮겨 사망했다. 9일장을 치르고 남양주에 있는 고종의 묘소 홍릉 옆에 안장되었다. 영친왕의 무덤에는 '대한제국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일생동안 고난의 길을 걸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친왕은 개인적으로 일본에 의해 박해 받은 일이 없어 대한민국 건국 이후 그의 정치적 입지는 극히 제한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 이후에도 주장할 수 있는 지분이 전혀 없었던 셈이다. 영친왕의 일생이 슬프고 안타깝지만, 그것을 대한민국이나 이승만 정부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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