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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빚의 제왕, 해풍부원군 윤택영

2010-05-22

빚의 제왕, 해풍부원군 윤택영
순종의 장인이자 빚의 제왕
해풍부원군 윤택영은 순종의 장인이었지만 그보다 빚의 제왕으로 유명했다. 당시 윤택영의 빚은 300만원에서 800만 원쯤이라고 알려졌는데, 개인 채무로는 사상 최대였다.

윤택영이 빚의 제왕으로 등극한 것은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황태자 신분이었던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국운이 쇠진했어도 황실과 사돈을 맺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부귀영화의 지름길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여러 가문에서 동궁계비 책봉 운동을 벌였다. 윤택영도 로비 대열에 가세하며 로비 자금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덕분에 1906년 윤택영의 열세 살 난 셋째 딸이 동궁계비로 책봉되었다.

황실과 사돈을 맺고 난 후에는 빚을 해결하기 위해 황실과 통감부를 상대로 채무 해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재정권과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황제인 순종도 재정을 사적으로 이용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해풍부원군 윤택영 씨가 여러 가지 빚 진 것으로 빚쟁이의 독촉을 받아 심히 곤란을 받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거니와 근일에 들은즉 전후 곤란한 사정을 황제 폐하께 아뢰고 처분을 기다린다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8일자 기사) -


한일병합을 계기로 빚을 청산하다
윤택영이 황실과 통감부를 상대로 채무 해결 운동을 벌인 지 1년 만에 채무를 일거에 해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호시탐탐 국권을 노리던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을 단행한 것이다. 이에 윤택영은 황실의 외척으로 병합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에 봉작되고, 은사공채 50만 4천원을 받았다. 윤택영이 받은 은사공채는 왕족 이강, 이희가 받은 83만원 다음으로 많았고 귀족 중에는 가장 많았다. 윤택영은 50만 4천원의 은사공채로 동궁계비 책봉운동 때 진 빚을 상당 수 갚았다. 하지만 1911년 김영규가 10여 년 전 빌려준 9만 5천원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내면서 다시 궁지에 몰렸다.

이에 윤택영은 재산이 300원밖에 없다며 빚을 청산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4만원을 빌려 집을 수리하는 등 윤택영은 채무에 시달리면서도 호화사치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택영 후작은 타인에 대한 채무는 점차 상환하지만 김영규의 채무는 조금도 반환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김영규는 총독부에 수차 청원하였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얻지 못한 까닭에 지난달 말에 일본인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윤씨의 동산을 집행케 하였다. 그러나 윤택영의 소유 재산이 겨우 300여 원에 불과하여, 집행하기 위해 찾아갔던 집달리도 의외의 상황에 '이것이 과연 조선귀족 대표의 재산일리오' 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법은 법인지라 전 재산에 봉인을 붙이고 돌아왔다. 경매는 지난 10일에 열렸다. 각 물품을 일일이 1전, 2전으로부터 경매에 붙였는데 부인용 의류 중에 좋은 것이 있어 겨우 1100원을 회수하였다. 원래 윤택영 후작은 지난날에 다액의 은사공채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밖에도 다수한 재산을 숨겨둔 의혹이 있으며, 또는 타인의 명의로 옮겨놓은 재산이 있을 개연성이 있다. 김영규는 끝까지 추적하여 이와 같은 사실이 드러나면 이번에 기어이 '재산은닉죄'로 고소할 것이라 한다.
- 매일신보 '윤후의 재산경매' (1911년 4월 13일자) -


평생을 빚에 시달리다
빚을 지고 호화로운 생활로 탕진하고, 그로 인해 차압이 들어오고, 경매 당하고, 또 빚을 지고, 또다시 탕진하는 악순환은 그로부터 10년을 두고 이어졌다. 호화로운 그의 집에는 수시로 집달리가 찾아와 차압 딱지를 붙이고 돌아갔다. 일본 왕이 하사한 화병, 고종이 하사한 친필서첩 등 당시로서는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귀한 물건에도 차압 딱지가 붙었다. 몇 천 원씩 집행당한 경매가 10여 차례 이어지기도 했다.

평생을 빚에 시달렸던 윤택영은 결국 1920년, 아들과 함께 북경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순종 비인 딸에게 사람을 보내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사정했다. 1926년 순종이 서거한 이후 일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면 1935년 사망할 때까지 15년간 빚으로 망명생활을 했다. 그리고 1928년 2월, 법원의 파산 선고로 후작 작위를 박탈당해 모든 예우가 중지됐다. 윤택영은 품위 실추를 사유로 작위를 박탈당한 첫 번째 귀족이란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윤택영은 1935년 어느 스산한 가을날 이역만리 베이징에서 임종을 지키는 가족 하나 없이 쓸쓸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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