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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담배 문화

2010-05-29

한국의 담배 문화
담배의 유입
인류 최초의 흡연가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으로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일본을 거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에도 전해졌다. 담배가 처음 조선에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담배가 병을 고치고 숙취를 해소하며 소화를 돕는 약으로 알았다. 그래서 농민들은 텃밭에 담배씨를 심고 잎을 따서 피웠고, 한번 담배 맛을 본 사람은 좀처럼 그 맛을 잊지 못했다. 담배는 급속히 퍼져나갔고 약이 아니라 차나 술과 같은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하멜이 <표류기>에서 '한국인들은 4~5세 때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길거리 담배 금지
시위대 병정 차만수가 긴 담뱃대를 물고 안동 네거리로 다니거늘, 순검이 그 병정에게 좋은 말로 타이르기를 '금령 아래 군인 되어 문란히 담뱃대를 물고 길에 다니는 것이 극히 온당치 못하다' 한즉, 그 병정이 도로 순검에게 꾸짖어 욕하며 가로되 '네가 나의 담뱃대를 금하려거든 궐련초를 사 달라' 하며, 또 말하여 가로되 '몇 날이 못 되면 너희가 우리 칼과 창 가운데서 놀리라' 하고 욕설이 무수하니, 순검의 힘으로는 금지하기 어렵다고 하였다더라.
- 독립신문 (1898년 1월 25일자) -


이 기사는 갑오개혁이 한창이던 1894년, 길거리에서 담뱃대를 이용한 흡연을 금지하면서 발생한 해프닝이다. 궐련은 대부분 수입산으로 1900년 이후 국산 궐련이 제조된 이후에도 품질이 조악해 값비싼 수입 궐련을 피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값비싼 외국산 궐련을 사 피울 형편이 못 됐던 가난한 날품팔이들은 담뱃대를 물고 다니며 단속하는 순검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기도 했다.

요즘과 같은 담배는 길거리에서 피워도 되지만 장죽이라는 담뱃대에 넣어서 피우던 전통 담배는 금지한 것인데 표면적인 이유는 담뱃대가 위생에 해롭고, 보행할 때 위험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는 개항 이후 수입된 궐련이 근대적이고 세련돼 보인다면, 담배 한대를 태우려 해도 시중 들 사람이 필요했던 긴 장죽이 미개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담배가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도나 주도와 같은 연의를 만들었다. 연의의 주요 내용은 '연장자 앞에서 흡연하지 말아야 하며, 평민은 양반 앞에서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평민의 담뱃대는 양반의 담뱃대보다 길어서는 안 되며, 여자가 남자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숨어서 피워야 한다. 보행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연장자를 만나면 담뱃대를 즉시 뒤로 숨겨야 한다. 등이었다.

범국민적인 담배의 인기
조선에는 외국산 담배의 수입을 억제할 제도가 전무했다. 일본의 담배 관세가 원가의 150%였음에 반해 조선에서는 20%에 불과해 담배회사로 보면 조선은 천국과도 같은 시장이었다. 개항 초기 외국산 담배는 개항장에 거류하는 외국인이나 대도시의 일부 상류계층에 한정돼 소비되었다. 500개비 들이 담배 2갑이면 쌀 한 가마니와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가격도 무척 비쌌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후 저가의 일본산 담배가 수입되면서 권련은 중산층 이하의 계층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갑오개혁 이후 거리에서 담뱃대 사용을 금지함에 따라 궐련 보급은 더욱 촉진되었고, 또한 법령에 따라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려면 궐련을 피우는 수밖에 없었다. 단발령 이후 단발과 양복이 대중화되면서 일상에서도 구식 담뱃대는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외국산 궐련이 대체했다.

한국의 궐련 제조 기술이 일천한 상태에서 궐련 흡연이 권장됨에 따라 한국은 외국산 담배의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 미국은 물론 러시아, 이집트, 터키산 담배까지 수입되었다. 다양한 담배가 판매되었지만, 무라이 형제상회의 '히로(hero)', 이와타니 상회의 '텐쿠(天狗)'가 인기 있었다. 상류계층에서 노동자, 아이들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은 히로는 궐련을 뜻하는 보통명사처럼 사용되었다.

일본의 독보적인 인기에 미국과 영국계 회사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1904년 조선에 진출한 영미연초회사(The British American Tobacco Company: BAT)는 일본이 선점한 조선의 담배 시장을 맹렬히 잠식해 들어갔다. 영미연초회사는 조선의 주요도시에 판매점을 개설하고, 대대적인 판촉전을 벌였다. 악단을 동원해 거리 홍보에 나서며 담배를 공짜로 나눠주기도 했고, 파리에서 활동사진을 수입해 자사의 담뱃갑과 입장권을 교환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담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1904년에는 궐련 수입액만 120만원에 달했다. 그해 자본금을 30만원으로 증자한 한성은행을 4번 설립할 수 있는 외화를 담배로 태워 없앤 셈이다. 그래서 국산 담배를 애용하자는 운동도 생겼다.

농상공부 관리 일동이 궐련 먹는 일에 대해 결의하기를 '한반도'라는 궐련은 비단 본국 사람이 제조할 뿐 아니라 맛도 좋고 값도 싸니 앞으로는 외국 궐련을 먹지 말자고 일제히 동맹하였다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9일자 신문) -


하지만 외국산 궐련에 길들어진 소비자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또한 곡물을 재배해야 할 땅이 담배 밭으로 변해가는 등 담배로 인해 피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유학자들은 곡식 농사를 보호하기 위해 금연을 주장했지만 담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이유만으로 흡연을 금지할 수 없었다. 영조 역시 애연가로 지방수령에게 비옥한 땅에는 담배를 경작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선에서 금연 논쟁을 정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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