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영어 하나로 신분의 벽을 넘은 이하영

2010-06-05

최고의 명품 고무신 생산업체, 대륙고무주식회사
대륙고무주식회사는 순고무 경제화의 원조 기업으로 1922년, 이하영이 자본금 50만 원으로 창립했다. 이하영은 주식회사를 조직하면서 박영효, 이윤용 등 다수의 귀족을 주주로 참여시키고, 자신의 차남인 이규원, 이근택 자작의 장남인 이창훈 등을 이사진에 포함시켰다. 경영진의 구성부터가 귀족 회사였다. 대륙고무주식회사가 생산한 대륙고무신은 ‘만월표고무신’, ‘별표고무신’, ‘거북표고무신’ 등 수십 개의 브랜드가 난립한 고무신 업계에서 최고의 명품브랜드로 시장을 석권했다. 대륙 고무신의 품질보다도 순종 황제까지 애용한다는 마케팅 전략이 주요했다.

"본인이 경영한 대륙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감함을 금치 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또 나인들, 일반 고객들이 각별히 애용하셔서 날로 달로 발전해 이번에 주식회사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고무 업계의 원조로서 더욱더 매진하여 조선은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진출하겠사오니, 더욱 애용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다른 회사가 조악한 제품을 본사의 제품이라고 사칭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본사의 상표 ‘대륙’에 주의하시옵소서."

1922년 9월 대륙고무주식회사 사장 이하영
- 동아일보 (1922년 9월 21일자)

장사꾼에서 외부대신까지
이하영은 대한제국에서 오늘날 외무부 장관격인 외부대신을 역임한 고위 관료로 1886년 27세에 외아문 주사로 벼슬길에 올라 상서원 주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국록을 먹은 지 1년 만에 주미 공사관 이등서기관이 되어 미국 땅을 밟는 행운아였다. 그러나 1884년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남경호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 의사 알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한낱 미천한 장사꾼에 불과했다.

이하영은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인 1858년, 경상도 동래군 기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이 매우 구차해 기장에서 동래장을 내왕하면서 찹쌀떡 행상을 다녔고, 끼니나마 때울 요량으로 통도사에 동자승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1876년에는 혈혈단신 부산으로 이주해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의 세 항구가 일본에 개항하면서 이하영의 인생도 바뀌었다.

이하영은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밤낮으로 일본어와 일본 상인의 상술을 익혔다. 그렇게 8년이 지나고 이하영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장사 밑천도 어느 정도 마련했다. 그리고 1884년, 27세가 된 이하영은 고용살이를 청산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사업은 평소 알고 지내던 평양 출신 상인과 동업으로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며 무역을 하는 것이었다. 이하영은 동업자와 함께 나가사키로 건너갔지만 믿었던 동업자가 동업 밑천을 가지고 도주하며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하영은 다시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는데, 그 배가 남경호였고, 그 안에서 의료 선교사 알렌을 만났다. 알렌에게 영어를 배운 이하영은 외교관을 거쳐 외부대신까지 올랐는데, 영어로 출세한 최초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하영과 알렌의 만남
1884년 9월, 조선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알렌은 이하영처럼 딱한 처지였다. 이하영은 부산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알렌을 따라나섰다. 알렌이 맡은 첫 보직은 주조선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로 이하영은 알렌의 요리사로 들어가 서로 영어와 조선어를 가르쳐주며 생활했다. 그리고 알렌이 조선에 들어온 지 석 달째 되던 해인 1884년 12월 4일 밤, 갑신정변이 발발하면서 알렌은 온몸에 자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의 목숨을 구했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왕실의 신임을 얻어 어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국립의료원 제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알렌은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이하영을 통역으로 삼고, 진료를 위해 고종을 알현할 때도 이하영과 함께 하길 원했다. 그러나 벼슬이 없는 이하영은 관복을 입고 어전에 나갈 수 없었고, 사정을 들은 고종이 배운 것도 변변치 않고 집안도 한미한 이하영에게 외아문 주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로써 이하영은 영어 실력 하나로 출세의 탄탄대로에 들어선 것이었다.

이하영의 미국 생활
이하영이 외교관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887년으로 한국이 미국에 공사관을 설립하면서부터이다. 초대 주미 공사에는 박정양이 임명되고, 1등 서기관에는 이완용이, 그리고 2등 서기관에 이하영이 임명된다. 알렌 역시 제중원을 사임하고 주미 공사관의 서기로 임명되면서 이하영과 동행하게 된다.

이하영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 2년 만에 제2대 미국 공사에 임명되었다. 워싱턴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하영의 영어실력은 날이 갈수록 유창해졌고, 초대받은 연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며 달변과 현란한 춤 솜씨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래서 워싱턴 사교계에서는 조선공사 이하영에게 ‘상투 댄디(dandy)’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1889년 6월, 이하영은 이완용에게 주미 서리공사 자리를 물려준 뒤 1년 6개월간의 짧지만 ‘성공적인’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이하영의 행보
귀국 후 이하영은 웅천 현감, 흥덕 현감을 거쳐 5년 만에 정3품 외아문 참의로 승차했다. 한성부 관찰사와 일본 주재 공사를 거쳐 1904년 47세에 외부대신에 올랐다. 미국인 의사 알렌의 도움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하영은 철두철미한 친일파는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친일파라기보다는 친미파였다. 외부대신 시절 일본에 이권을 넘기는 데 앞장섰지만, 법부대신으로 옮겨가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을 때는 처음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보다 한발 늦게 찬성으로 의사를 번복해 천만다행으로 을사오적에는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하영이 처음부터 을사늑약에 찬동했다면 역사는 그의 이름을 을사육적에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늦게나마 을사늑약을 찬성한 까닭에 강제합방 이후 일본에게서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얻었다. 이하영은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인물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실력을 닦아 신분의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