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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을 상대로 소금 값 반환 투쟁을 벌인 소금장수 김두원

2010-06-12

일본을 상대로 소금 값 반환 투쟁을 벌인 소금장수 김두원
소금장수 김두원
김두원은 원산을 거점으로 동해안 일대를 오가며 소금을 도매하는 거상이었다. 1907년 천일염이 등장하기 이전 한국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모두 바닷물을 끓여서 얻은 자염이었다. 손이 많이 가고, 연료비도 많이 들어 값이 몹시 비쌌으며 어지간한 자본 없이는 값비싼 소금을 도매로 취급할 수 없었다.

키무라 형제에게 사기를 당하다
김두원은 부유한 거상인만큼 사기도 크게 당했다. 김두원은 가쓰라 일본 총리와 소네 통감에게 소금 값을 돌려달라는 투서를 보내기도 했다.

"함경남도 원산항에 거하는 소금장수 김두원씨가 소금 값 5만1919원을 추심할 차로 작년 겨울에 가쓰라(桂太郞) 일본 총리와 소네(曾禰) 통감과 중의원 의장에 장서(長書)를 제정하였다는데 지금까지 어떠한 조치도 없으므로 본월 7일에 또 장서와 증거 되는 신문을 동봉하여 일본 가쓰라 총리와 소네 통감과 중의원 의장으로 보내고 소금 값을 속히 보내라고 독촉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5일자

1899년 5월 경상북도 포항 모포로 내려가 객주 김쌍동의 집에 머물면서 가을 김장철에 내다팔 소금을 매집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객줏집 창고는 1,088섬 소금 가마니로 가득 찼다. 매입원가는 5,191원이었지만 김장철 원산에서 매도하면 1만원은 넉넉히 받을 수 있었다.

소금 매입을 끝낸 김두원은 원산으로 소금을 실어 나를 배를 구했는데, 때마침 포구에는 일본 배 한 척이 정박 중이었다. 시마네현에서 사는 키무라 형제의 배로 김두원이 소금 운송을 부탁하자 키무라 형제가 제안을 하나 했다. 김장철이 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에 원산에 소금을 싣고 가 봐야 보관하기만 번거로우니 소금이 없어서 잡은 고기가 썩고 있는 울릉도에 팔고, 소금을 다시 모으자는 것이었다. 키무라 형제의 제안에 귀가 솔깃한 김두원은 키무라 형제의 배에 소금을 싣고 목적지를 변경해 울릉도로 떠났다.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고, 긴 항해로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뭍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소금을 내리자는 키무라 형제의 제안에 김두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울릉도 주민의 집에서 지내고 이튿날 새벽 포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포구 어디에도 키무라 형제의 배는 보이지 않았다. 키무라 형제가 소금 1088섬을 싣고 망망대해로 유유해 사라진 것이었다.

30년간의 소금 값 반환 소송
사기를 당한 김두원이 키무라 형제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김두원은 키무라 형제를 찾아 소금 값을 돌려받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공사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외부대신 박제순은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진상조사를 요청했는데, 시마네현 사법 당국이 조사한 결과 김두원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야시 공사는 대한제국 정부에 유감을 표하면서 키무라 형제는 사법 처리돼 징역을 살고 있지만, 그들이 은닉한 재산은 발견할 수 없다며 상속인인 키무라 킨노스케 역시 실업자인 데다 너무 가난해 소금 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 된다고 회신했다. 그리고 김두원에게는 구휼금 명목으로 몇 백 원이 송금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김두원은 소금 값 51,919원을 모두 받아야겠다며 구휼금의 수취를 거부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탄원서를 썼지만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한제국과 일본의 고관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해결을 도모했다. 그리고 1903년, 김두원은 일본공사관 정문 앞에서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는 하야시 공사를 만났다. 4년 동안 겪은 설움에 복받쳐 인력거를 붙잡고 소금 값을 돌려달라고 사정하면서 눈물까지 쏟았다. 하야시 공사는 못 들은 척 외면했고, 경호 순사들이 달려들어 완력으로 김두원을 제지했다. 김두원은 참았던 분노가 갑자기 끌어올라 순사를 뿌리치고 하야시가 타고 있던 인력거를 거칠게 밀쳤다. 이에 인력거는 쓰러졌고, 하야시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당시 하야시 공사의 위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드높았기 때문에 김두원은 하야시를 폭행한 대가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항일 운동의 상징 인물로 떠올라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경향신문’ 등 각 신문사들은 앞 다투어 김두원의 의기를 칭송했다.

10년 가까이 투쟁을 지속하는 동안 김두원은 이유 없이 구금되고, 절해고도로 유배되기를 거듭했다. 소금 값을 돌려받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재산은 바닥났고, 가족들은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이 몇 원씩 구휼금을 보내 주기도 했고, 유길준 등 대신을 찾아가 돈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몇 백 원 구휼금으로 합의를 시도하면 단호히 거부했다. 당당하게 받을 소금 값이 있는데, 구휼금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일병합 이후에도 김두원의 투쟁은 이어졌다. 일본총리, 의회, 조선총독, 경시총감 등에 매일 같이 탄원서를 보냈고, 고관들을 쫓아다며 소금 값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애원했다. 김두원은 71세가 된 1920년까지 탄원서 투쟁을 지속했다. 그해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수록된 탄원서에서 그는 일본 정부가 소금 값을 배상할 수 없으면 인천, 진남포, 군산 3항구의 소금 전매특허권이라도 달라고 요구했다. 그 후 김두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죽는 날까지 투쟁을 지속했고, 끝내 소금 값을 돌려받지 못했을 것이란 추측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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