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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제국판 로또, 채표 열풍

2010-06-19

대한제국 시절 복권, 채표
채표란 복권의 중국어로 한일병탄 이전 한국에서 판매된 복권은 모두 중국산 채표였다. 복권은 유통과 추첨, 당첨금 지급 등에서 기술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사행성을 부추기는 복권 발행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중국산 복권의 판매와 구입까지 금지하는 법령이 공포되기도 했었다.

한국에서 판매된 중국 채표의 기원도 사실은 수입품이었다. 중국 채표의 효시는 스페인이 식민지 필리핀에서 발행한 여송표로 1850년대 중국에 유입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898년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획득한 후 발행을 중지했다. 청국 정부가 도박을 엄금했기 때문에 복권이 인기 있어도 공공연히 복권을 발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채표 시장을 독점하던 여송표의 수입이 중단되었고, 1899년 이후 각 성은 앞 다투어 공사를 설립하고 채표 시장에 뛰어들었다. 1899년 광제공사에서 발행한 강남채표는 60만원이던 연간 판매량이 2년 만에 180만원으로 확대될 정도로 쾌속 성장했다.

채표 열풍
중국 상인이 처음 한국 땅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은 1882년 조청상민수륙통상장정 채결 직후이다. 당시 중국은 한국을 속방으로 간주했고, 청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후광을 업고 한국의 상계를 장악했다.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채표가 발행된 지 채 1년이 되기도 전, 안창호, 동순태, 행화춘 등 한국에 진출한 중국 상사들은 강남채표, 교주채표, 호북채표 등을 수입, 판매했다.

한국 신문에 처음 채표 광고가 등장한 것은 1899년 11월로 채표 열풍의 정점이었던 1902년 황성신문 광고의 절반이 채표 광고일 정도로 한국의 채표 열기는 뜨거웠다. 1등 상금이 최소 판매액의 20%나 점했고, 판매액의 70~75%가 당첨 액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호북채표는 한때 1등 당첨금이 10만원까치 치솟았는데, 10만원이면 중국에서도 웬만한 회사 자산과 맞먹었다고 한다.

당시 채표의 1매당 가격은 중국 노동자 한 달 치 생활비와 맞먹는 5원으로 매우 비쌌다. 그리고 부유층을 상대로 한 판매가 한계에 이르자, 호북채표는 한 장을 10매로 분할 판매해 서민층까지 구매계층을 확대했다. 그러나 서민층이 무리해서 채표를 구입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채표의 부작용
점점 채표가 인기를 끌면서 부작용도 있었다. 채표의 중주국이었던 중국에서도 1907년, 채표의 과열은 망국과 망민의 풍조라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지방 재정 조달 때문에 폐지를 못하고 있다가 1909년 말 광둥성과 강소성이 채표를 금지하면서 각 성에서 채표 발행을 금지했다. 그리고 1911년, 중국 전역에서 채표 발행이 중지되었고, 그 이전인 1909년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채표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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