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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최초의 독일계 상사, 세창양행

2010-06-26

조선 최초의 독일계 상사, 세창양행
학질에 효과 만점, 금계랍
100년 전 신문에 가장 많이 실렸던 광고는 바로 '금계랍' 광고로 독립신문에는 600여 회 실릴 정도로 인기 있는 약이었다. 금계랍은 퀴닌(quinine)의 다른 이름으로 말라리아의 특효약이었다. 말라리아는 열대지방에서 온대지방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풍토병으로, 한국에서도 여름이면 찾아오던 학질이 말라리아의 일종이었다.

한국의 학질은 열대 지방의 말라리아에 비해 증상이 약해 젊고 건강한 사람은 약을 먹지 않아도 낫곤 했지만 대증요법 외에는 별다른 치료약이 없어 노인, 아동 등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리고 왕실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계층에 상관없이 학질에 노출되었고, 임진왜란 기간에는 인구의 70~80%가 학질을 앓을 정도로 전염성이 강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금계랍이 수입되기 시작하며 학질 치료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금계랍은 치료비와 약갑 없이 무료로 치료해주는 국립의료기관인 <제중원>에서도 10알에 500푼을 받고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금계랍의 효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상비약으로 쓰려고 필요 이상으로 얻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제중원을 찾은 환자 중 말라리아 환자가 가장 많았던 것도 금계랍의 탁월한 효험 덕분이었다.

개항 이후 진출한 독일계 기업, 세창양행
금계랍을 판매한 세창양행은 1883년 조선과 독일의 수교 이후 조선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계 상사였다. 공동 사주 마이어는 홍콩에서 무역업을 하던 사람으로 마이어 상사는 성장을 거듭해 함부르크, 런던, 홍콩, 인천, 톈진, 한커우 등에도 지사를 설립했다. 세창양행은 마이어와 볼터가 합작으로 인천에 설립한 마이어 상사의 한국법인이라 할 수 있다. 마이어는 주로 함부르크에 거주하면서 유럽과 동아시아 무역을 총괄했고, 세창양행의 경영은 인천에 거주하는 볼터가 주로 담당했다.

당시 한국은 서양 문물에 대한 개방이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1884년 5월, 인천에서 세창양행이 설립되었을 때, 조선의 외교, 통상, 관세, 재정은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주도하고 있어 비교적 쉬웠다. 중국 주재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던 묄렌도르프는 1882년 연말 청국 북양대신 리훙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부임했고, 통리기무아문 협판(외교부 차관), 해관 총세무사(관세청장), 전환국 총판(중앙은행장)을 차례로 겸직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경제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차관 도입, 농업 개혁, 물류 시스템 정비, 광산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고, 그가 일으킨 사업은 대부분 세창양행이 대행했다. 사업 초기 세창양행은 독일산 바늘, 염료, 금계랍,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했고, 조선산 쇠가죽, 쌀, 콩 등을 수출했다. 대중들에게는 소비재 판매로 '세창'이라는 상표가 각인되었지만, 세창양행의 주요한 매출은 정부를 상대로 한 이권 사업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1885년에는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조선 정부와 기선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세창양행이 조선 정부를 대신해 기선을 임대해 상하이, 부산, 인천, 목포 등을 왕복하며 세미를 운송하는 계약이었다. 세창양행은 운항수수료 5%와 이윤의 절반을 얻었다. 세창양행은 묄렌도르프가 주도한 전환국에 독일산 조폐 기계를 조달했고, 기술자 초빙에도 관여했다. 세창양행은 자체 자금 2만 파운드를 조선 정부에 차관으로 제공하고, 매년 3만 석의 세미를 운송할 권리를 획득했다. 관세를 담보로 설정했고, 매년 10%의 이자를 받기로 했으므로 세미 운송권은 말 그대로 덤이었다.

이 계약은 조선 정부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내용이다. 당시 조선은 국제 정세에도 어두웠고, 무역에는 더욱 어두워서 엄청난 세금을 허투를 썼다. 1887년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에 연리 12%의 고리로 차관을 제공하고, 독일 기선 2척의 구매를 대행했다. 세창양행은 조양호와 창룡호라 명명된 두 기선의 운항 역시 대행했다. 즉, 세창양행이 자체 자금으로 사서 자체적으로 운항한 기선 사업에 조선 정부가 차관을 얻어 명의를 빌려준 셈이었다. 이런 이상한 계약 덕분에 세창양행은 세금을 면제받았고, 이익은 자신이 챙기면서 위험은 조선 정부에 전가시켰다.

한국 총영사에 임명된 마이어
세창양행을 운영하는 마이어는 한국에서 함부르크 주재 한국 총영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개항 초기 조선에서 외국인을 해당 국가 총영사에 임용하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 최초의 외국인 총영사는 1884년 1월, 뉴욕 주재 조선 총영사로 임명된 프레이자였다. 프레이자는 오랫동안 대 아시아 무역에 종사했고,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미영익 일행을 수행하며 조선과 인연을 맺었다. 프레이자는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푸트에게 자신이 무급 총영사에 임용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고, 고종은 푸트의 건의를 받아들여 프레이자를 뉴욕 주재 조선 총영사에 임명했다.

1886년, 서울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는 세창양행 공동 사주 마이어를 함부르크 주재 조선 총영사로 임명해 줄 것을 건의했다. 조선 정부는 상인에게 총영사를 대리시킬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부들러가 재차 간청하자 그해 3월 마이어를 함부르크 주재 조선 총영사에 임명했다. 그 후 마이어는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할 때까지 20여 년간 조선 총영사 직함을 유지했다.

그러나 당시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이어의 총영사 직위는 사실상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마이어의 총영사 직위 덕분에 세창양행은 독일로 수출하는 물품 대부분을 영사관 용품이라는 명분으로 수출세를 면제받았다. 마이어가 총영사로서 공식적으로 수행한 임무는 1889년 함부르크 산업박람회에 조선 물품을 출품하고, 1894년 함부르크 미술공예박물관에 조선 전시회를 개최한 것 정도였다. 결국 마이어는 외교관 면세 특권을 누리기 위해 총영사 자리를 맡은 것이다.

세창양행 공동 사주, 볼터
볼터는 1885년에서 1907년까지 22년간 조선에서 사업하면서 2남 6녀를 낳아 길렀고, 서울과 인천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볼터는 '제물포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했다. 1898년 덕어학교가 설립되자 경제적으로 후원했으며, 1899년에는 독일 하인리히 황태자의 방한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한독관계에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1907년에는 마이어와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세창양행을 단독으로 경영했다. 세창양행의 한국어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영문 표기는 'E. Meyer & Co.'에서 'Carl Wolter & Co.'로 변경되었다. 그해 볼터는 건강이 나빠져 세창양행 경영을 독일인 지배인에게 맡기고 독일로 귀국했고, 1916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세창양행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독일인의 출자가 동결되면서 타격을 입었지만, 6‧25전쟁 발발로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명맥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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