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고종과 미국 여인 에밀리 브라운 혼인! 오보 기사의 출처는?

2010-07-03

고종과 미국 여인 에밀리 브라운 혼인! 오보 기사의 출처는?
파란 눈의 황후! 외국 기사 오보
1903년, 고종 황제가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미국 여인과 혼인했다는 기사가 났다. 주한 미국공사관에는 에밀리 브라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외국공관들의 문의가 이어졌고, 한국 황실에 일자리를 구하려는 미국인들의 이력서가 쇄도했다. 간호사, 의사, 가정부, 가정교사, 마부, 요리사, 심지어 치과 의사들까지 이력서를 보내왔다. 이는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미국 여성이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었다는 기사를 미국의 유력 일간지들이 잇달아 게재를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주한 미국공사관에서는 오보라는 성명서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주한 미국공사관을 발칵 뒤집은 고종과 에밀리 브라운의 혼인 기사는 1903년 11월 29일,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신문에 나온 '어떻게 하나뿐인 미국인 황후는 왕관을 쓰게 되었는가?'란 기사 때문이었다.

에밀리 브라운은 미국 오하이오에서 장로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가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녀도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해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다. 한국에서 황제는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 황제는 선교사의 딸에게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한동안 에밀리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했지만, 황제가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에밀리는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교회 일을 그만두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중략>
에밀리의 황후 책봉식은 1903년 8월 거행되었다. 서울에서 거행된 평민 출신 에밀리의 황후 책봉식은 알라딘과 아라비아 공주의 결혼식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엄했다. 책봉식이 거행되기 며칠 전부터 예행연습이 시작되었고, 책봉식 당일에는 아침부터 전국에서 축하객들이 사대문 안으로 구름처럼 밀려들어왔다. 진군 신호가 울리자, 황제의 친위대 1000여 명이 인산인해를 이룬 거리를 보무당당하게 행진했다.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리자 황궁 문이 열리고 거대한 가마 두 대가 나란히 거리로 나왔다. 한 대에는 황제가 나머지 한 대에는 황후로 책봉될 에밀리가 타고 있었다. 에밀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황실의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했다. 황후 책봉식에는 문무백관은 물론 미국공사, 일본공사, 영국영사 등 각국 외교 사절이 참석했다. 에밀리는 '아침 여명'이란 뜻을 지닌 '엄 황후'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아들을 출산하면 언젠가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아들은 역사상 최초로 미국인의 피가 흐르는 황제로 기록될 것이다.
-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1903년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를 시작으로 전 세계 일간지들은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다른 지역 신문이 보도한 기사를 인용, 각색해 선정적인 기사들을 쏟아냈다. 뉴질랜드에서 간행된 <이브닝 포스트> 1903년 9월 12일자 기사는 <뉴욕 헤럴드>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고,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1903년 10월 24일자 기사는 오스트리아에서 간행된 <노이에 프라이 프레세>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에밀리 브라운의 나이는 24세에서 43세까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했고, 고향도 오하이오에서 위스콘신까지 제 멋대로 옮겨 다녔다. 아버지 브라운 목사가 화가나 결혼식 참석을 거부하자 미국 공사 알렌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알렌은 유럽에서 가족과 함께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문사들이 서로서로 베껴 쓰다 보니 허무맹랑한 기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출처조차 불확실했다.

주한 미국대사관 알렌은 오보를 낸 미국 일간지들을 대상으로 정정 기사를 낼 것을 항의했지만 정정 기사를 게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퇴위한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에밀리 브라운의 근황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 어떤 신문은 에밀리 브라운의 근황이라며 초라한 옷차림의 미국 여인이 당나귀를 타고 있는 사진까지 게재하기까지 했다.

기사 오보 출처는?
어처구니없는 소동의 출처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다. 대한제국 궁내부 외교 고문 샌즈는 당시 많은 외국 기자들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쟁이 발발하지 않자 맨손으로 귀국하게 된 기자들이 의기투합해 지어낸 기사라는 것이다.

또한 한미 관계사 연구의 권위자 김원모 교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알렌의 자작극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미국 일간지 최초로 에밀리 브라운을 보도한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 1903년 10월 24일자 기사는 알렌이 그 신문 편집장과 인터뷰한 직후에 게재되었고, 에밀리 브라운의 고향이 알렌의 고향인 오하이오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알렌이 거짓 정보를 흘린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렌은 외교관이기 이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잔꾀를 부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이 김원모 교수의 지적과 달리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가 미국 일간지 최초로 에밀리 브라운을 보도한 것도 아니었다.

1903년 7월 19일자 기사 '이제 보위에 오르다'에서는 에밀리 브라운을 엄 황후나 왕위 계승자의 어머니로 설명하며 에밀리 브라운이란 가상의 인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해명할 실마리를 제공했다.

위스콘신 애플톤의 산골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에밀리 브라운은 40대에 이른 지금은 대한제국의 엄 황후이자, 대한제국 황위 승계자의 어머니다. 지난 1월, 대한제국 형(고종의 본명) 황제는 재위 40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후궁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에밀리 브라운을 황후로 책봉하고, 그녀의 아들을 황위 승계자로 선언했다. 황후로 책봉되기 전 에밀리 부인으로 알려졌던 그녀는 이제 '아침 여명'을 뜻하는 엄 황후가 되었다.

에밀리 브라운은 장로교 순회 목사 헐버트 브라운과 무척 아름다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 에밀리는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약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국어를 빨리 익힌 그녀는 교회의 통역으로 정부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에밀리의 미모는 황제에게 보고되었고, 황제는 그녀에게 후궁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에밀리는 분개해서 거부했다. 2년 후, 에밀리는 국사가 허락할 때 결혼하겠다는 황제의 진지한 약속을 믿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아들을 낳은 직후, 황제는 그 약속을 지켰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던 그녀는 황후에 책봉되기 전에도 수년간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맡았지만, 이제는 명실 공히 황후가 되었다.
- < LA 타임즈> 1903년 7월 19일

명성황후 사후에 영친왕의 모친인 엄비는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친왕이 태어나기 전까지 엄비는 아무런 봉작이 없는 궁인이었다. 1897년 영친왕이 태어난 이후 귀인에 책봉되었고, 1900년 순빈으로 승격되었다. 1903년 1월, 엄비는 황귀비에 책봉되기로 결정되었고, 그해 12월 책봉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황귀비가 되었다. 이처럼 엄비의 일생은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곤 에밀리 브라운과 흡사했다. 결국 이 엄비가 와전되어서 에밀리 브라운이 되었다고 한다.

엄비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남짓 거주했는데, 그때 러시아 공사관에 드나들던 서양 여성을 엄비로 오인했을 수도 있고, 미국인 귀에 엄비가 에밀리 비슷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미국 언론이 토종 한국인 엄비를 에밀리로 둔갑시킨 덕분에 애꿎은 주한 미국공사관만 황제 사위 덕에 일자리를 구해보려는 미국인들의 등쌀에 시달렸던 셈이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