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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 세계를 경악케 한 사이비 종교의 만행, 백백교 사건

2010-07-10

사이비 종교, 백백교
식민지 시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갖가지 신흥종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동학계의 천도교, 시천교, 상제교, 증산계의 보천교, 흠치교, 태을교, 단군계의 단군교, 대종교, 칠성교, 관성교 등 총독부가 파악한 것만 해도 70여 개에 달했다. 밀교의 형태로 운영된 것은 그보다 몇 배나 많았다. 총독부는 신도,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유사종교로 분류했다. 종교는 학무국 종교과의 관리 대상이었지만, 유사종교는 경찰서 보안과의 단속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총독부에 의해 유사종교로 규정된 신흥종교 모두를 사교나 사이비 종교로 치부할 수는 없다. 가령 천도교는 백백교와 같은 동학에 뿌리를 둔 종교이지만, 1910년 교인수가 100만을 넘었고 독립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악한 종교도 분명히 존재했고 실제로 1937년, 로이터 통신이 선정한 세계 10대 뉴스에 오를 정도로 전 세계를 경악케 한 사이비 종교, 백백교 사건이 있었다.

동대문서 고등계는 지난 2월 16일 밤 10시를 기해 필사적으로 백백교 검거에 나섰다. 2달여의 활동에 의해 백백교의 죄상이 청천백일 하에 폭로되었다. 백백교는 이름만은 종교단체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순전한 사기, 부녀자 능욕, 강도, 살인 등을 거침없이 한 흉악무도한 결사다. 소위 교주된 자와 그 간부가 되는 자들은 우매한 지방 농민들을 허무맹랑한 조건으로 낚아 재산을 몰수하고, 부녀자의 정조를 함부로 유린한 후, 그 비밀을 막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했다. 교도 중에서 피살된 자가 사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현재 판명된 자만도 158명에 달한다. 전율할 숫자는 세계범죄사상 전무후무한 범죄 기록이 될 것이다.
- <조선일보> 1937년 4월 13일

백백교의 기원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북 영변 태생의 동학도 전정운은 금강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1900년 천지신령의 도를 체득한 후 세상에 나왔다. 전정운은 전용해의 부친으로 당시 나이 30세였다. 그는 함남 문천군 운림면을 중심으로 인근 사람들에게 도를 전했다. 그를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1912년 강원도 금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정식으로 백도교를 개창했다. 동학에 뿌리를 둔 백도교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부근 각처에 지부를 두고 포교에 힘써 1915~6년경에는 교도가 1만 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죽자 교세확장 방법을 둘러싼 간부들의 대립과 부친유산 분배를 둘러싼 골육간의 쟁투로 교단이 분열되었다. 결국 세 아들이 모두 독립하여 각자 교단을 하나씩 차렸다. 전정운의 맏아들 전용수는 경성부 도화정에 본부를 둔 인천교를 창립했고, 둘째 아들 전용해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본부를 둔 백백교를, 그리고 셋째 아들 전용석도 형들에 지지 않고 경성부 도화정에 도화교를 창립했다.

백백교 교주, 전용해
특히 둘째 아들 전용해가 창립한 백백교는 유불선 삼도를 합한 것을 교리로 하고 교주는 결백한 심령을 가지고 퇴폐한 세도인심을 교화하여 추악한 현세를 아름답게 한다는 설교로 신도를 모았다. 백백교는 백도교의 성지 함남을 비롯하여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까지 교세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표면상의 교리가 그렇다는 것이고, 교단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파죽지세로 뻗어가던 백백교의 교세는 1930년 7월, 10여 년 전 백도교 교주 전정운이 금화군 오성산에다 그의 애첩 4명을 산채로 파묻은 구악이 폭로돼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한풀 꺾였다. 전용해와 표면상 교주인 차병간은 가까스로 검거망을 벗어났고, 지방을 전전하며 비밀리에 교단을 재건했다. 백백교 간부들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을 순회하며 무지몽매하여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다소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포섭했다. 백백교 간부들은 정감록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도령과 소리가 비슷한 교주 전도령이 후천개벽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 호언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투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불로장생, 부귀영화라는 말로 입교를 권유했다.

그리고 백백교는 교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자행했다. 전용해와 측근 간부는 교단에 불만을 품은 교도를 배교분자로 분류했다. 교주는 배교분자를 비밀 아지트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올려주었는데, 기도는 교도를 살해해 암매장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성인들은 타살된 후에 어린 아이들은 산채로 암매장되었다.

만 천하에 드러난 백백교의 만행
백백교의 만행은 해주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는 유곤용의 활약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씨 집안의 재산은 30여 년 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유곤용의 조부는 임종하기 전, 유곤용에게 백백교라는 신흥종교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며 비밀을 털어놨다. 하지만 부친 유인호는 조부보다 더 독실한 백백교 신도였다. 조부가 죽은 후 부친 유인호는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정리해 가솔들을 이끌고 백백교 본부가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재산 일체는 물론 18살밖에 안 된 딸 유정전마저 대원님께 바쳤다. 유곤용은 거짓으로 백백교 교도가 되어 전용해를 만나 잘못을 따지고 경찰에 실체를 폭로한 것이다.

유곤용에 의해 백백교의 정체가 드러나고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가자 전용해는 탈출했다. 전용해는 만일을 대비해 사진 한 장 남겨 두지 않았고, 김두선을 비롯한 16가지의 가명을 쓰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용해의 인상착의는 전적으로 체포된 백백교 핵심 간부들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동거하던 애첩들조차 그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본 적이 없어 생김새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2인자 이경득과 교주의 아들 전종기 정도였다. 경찰은 검거에 나선 지 50여일 만에 양평군 용문산에서 전용해로 추정되는 사체 한 구를 발견했다. 전종기는 코 아랫부분이 산짐승에게 먹혀 없어진 시체를 보자마자 아버지라고 부르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또한 양복주머니에선 전용해가 차고 다니던 시계와 80여원이 들어 있는 지갑이 나왔다. 하지만 그 시신이 전용해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전용해의 시신을 처리하면서 연구를 위해 뇌를 보관해 왔다. 그리고 얼마 전 법원에서 전용해의 뇌를 화장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전용해와 함께 만향을 자행했던 백백교 간부들을 수사하는데는 3년이 소요되었다. 살인 기록 보유자 문봉조 외 간부 24명은 보안법 위반, 살인, 사체유기, 상해치사, 살인강도, 외설, 사기 공갈, 횡령, 공사문서 위변조 등 10개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재판은 의외로 짧게 끝났다. 1년은 족히 걸리리라는 예상과 달리 공판은 일주일, 4회로 종결되었다. 검사는 살인과 관련된 18인의 피고인 전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장은 가담 정도가 경미한 피고인 4명만 징역 7~15년으로 감형하고 나머지 14명에게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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