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은 단두 유아 사건

2010-07-17

도심 한 복판에 살해된 채 버려진 유아

15일 오전 8시경에 시내 죽첨정 185번지 공터에는 나이 3살가량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목을 잘라서 버린 참혹한 사건이 있었다. 아지 못할 사람이 해주는 전화로 이 일을 안 소관 서대문서에서는 서장 이하 간부 전부가 현장에 달려갔으며 급보를 접한 검사국에서는 요다 검사가 서기 2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급행하였으며, 도경찰부 형사과로부터는 노무라 과장과 후타미 수사계 주임이 역시 현장에 달려와 현장의 조사에 착수하였다.
- 조선일보 1933년 5월 17일자


단두 유아 사건이 발생 당시, 수사대가 현장에 갔을 때는 구경꾼이 많아서 현장은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잘린 머리의 뒤통수는 두 치 반이나 깨어져 뇌수가 흘러내렸고, 매립지 곳곳에는 핏자국과 뇌수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깨어진 두개골 안쪽으로는 날카로운 칼로 뇌수를 파낸 흔적이 역력했다. 치마폭, 종이, 낡은 수건으로 세 겹으로 감싼 머리는 쓰레기 매립장 귀퉁이에 깊지 않게 묻혀 있었다. 머리를 옮기는 도중에 흘린 것으로 추측되는 피는 전찻길 건너 마포 방향으로 이어졌다. 수사대는 시신을 경성제대 법의학으로 옮겨 부검에 들어갔다. 부검 결과 만 1세 내외의 살아있는 남자 아이를 10시간 전에 살해한 것이다.

사건이 알려지자 서울에서는 대 소동이 벌어졌다. 아이 키우는 부모는 자기 아이가 희생되지나 않았을까 하여 놀러나간 아이를 찾느라 골목을 누볐고, 나병환자, 걸인, 막벌이꾼들은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숨었다. 그리고 복덕방, 다방, 카페, 빨래터 가릴 것 없이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온통 이 사건 이야기였고,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험난한 수사 과정
피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건의 남은 단서가 훼손된 아이의 머리뿐라 지문을 감정할 수도 없었다. 담당 형사는 머리를 싼 치마폭이 고급제품임을 근거로 가난한 집 아이는 아니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밖에 몇 가지 중요한 정보는 뇌수를 파낸 흔적으로 보아 범인은 나병, 매독, 간질, 등창병 등의 치료에 쓸 뇌수를 얻을 목적으로 아이를 죽였다는 것이다. 또한 쌀 봉투에 묻은 흙과 사건현장의 흙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아이는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유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과 뒤통수에 남은 칼날의 흔적으로 보아 범인은 칼을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도 아이의 부모는 나타나지 않았고, 부모가 범행에 관련되었다는 추측도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도 부모로서 제 자식의 목을 베었을 리는 없고, 아이의 보호자와 범인 간의 음험한 거래 아래 범행이 자행되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또한 아이의 보호자는 친부모가 아니라 팔 목적으로 얻어와 기르는 사람일 개연성이 컸다. 이렇듯 어설픈 추리로 인해 다른 사람의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애꿎게 수사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아이를 주워 기르는 사람들은 다 찾아다녔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렇듯 수사가 장기화되자, 경찰은 아이 무덤이나 의심 가는 곳은 어디든 팠다. 그러나 이 역시 효과는 없었다. 야산에서 암매장한 유아 사체 몇 구와 개 무덤 몇 개를 발견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사건발생 일주일째가 되도록 성과가 없자 노무라 형사 과장은 자리를 걸고 일주일 이내로 사건을 해결하라며 일선 경찰을 압박했다. 그리고 새로운 수사방침을 하달했다.

<수사방침 내용>
1. 집 잃은 젖먹이 아이 호구조사
2. 양육을 맡아 기르는 아이 발육상태
3. 사생아 기아를 기르는 집의 양육 상황
4. 간질병, 문둥병, 정신병자의 행방
5. 토막민과 걸인의 철저조사


이 같은 수사방침은 사실상 하층민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었다. 도경찰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시내 각 경찰서는 관내 걸인과 문둥병자를 일제히 검거했다. 서대문경찰서에는 문둥병자 4명, 걸인 39명 기타를 합하여 50여명을 검거했고, 종로경찰서는 60여명, 동대문경찰서는 90여명을 검거하는 기염을 토했다. 걸인과 문둥병환자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유치장에 갇혔다.

피의자 검거! 유아 살해 범인은 무당 가족?!
그렇게 해서 사건발생 17일째, 드디어 용의자가 검거되었다. 사건 자체가 엽기적이었던 만큼 용의자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용의자는 무당 가족 다섯 명과 뻐꾸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하수인이었다.

사건발생 당시 핏자국을 쫓던 경찰견 한 마리가 프랑스대사관 근처 무당집 문전에 이르러서 꼬리를 휘두르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개는 그 집으로 뛰어들어 걸레까지 물고 왔다. 경찰은 일찌감치 집 주인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사했다. 하층민과 전면전 이후 경찰은 무당 일가족 전원과 하수인을 체포하여 유치장에 가두고 연일 심문했다.

집에서 어린애 누비저고리 두 벌, 어린애 치마 한 벌, 어린애 보선 두 켤레의 증거품도 나왔다. 피 묻은 무당의 치마 한 벌과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동물 간이 들어있는 약탕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무당 가족은 범행을 일체 부인했다. 무당 이씨는 어린애 옷가지는 어린애를 위하여 굿할 때에 쓰는 것이고, 치마에 묻은 피는 생리 때 묻은 것이고, 간은 병문안 온 사람이 등창병에 좋다며 가져온 소간이라 말했다. 그러나 하수인이 일주일 만에 자백했다.

그러나 무당은 범인이 아니었다. 무당 남편은 5월 12일 오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이튿날 사망했다. 그 사실은 세브란스병원 진료기록과 사망진단서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이 머리가 발견된 것은 5월 16일 오전 7시 30분이었고, 부검 결과 사망 시간은 빨라야 15일 밤 9시 30분이었다. 즉, 아이를 죽여 골을 빼먹었다는 무당 남편이 아이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다시 말해 뻐꾸기의 강요된 자백 덕분에 경찰이 애매한 사람을 잡은 것이다.

단두 유아 사건 진범 검거!
사건발생 20일째, 경찰은 동일한 방법으로 수사를 해봐야 별반 소득이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수사지휘부는 살아 있는 아이의 머리를 자른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의 머리를 잘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건발생 5일 전까지 죽은 아이의 무덤을 모두 발굴했다. 그리고 이튿날 염리공동묘지에서 머리 없는 아이 시체가 발견되었다. 쿠니후사 교수의 집도 아래, 요다 검사, 노무라 형사과장, 키무라 서장 등 수사수뇌부가 입회해서 실세된 부검은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통상 1시간 정도면 끝나는 부검은 3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부검 결과 예상대로 머리와 몸통은 동일인의 것임이 판명되었다.

범인은 아이 아버지인 한창우의 집 건넛방에 사는 배구석이었다. 배구석과 한창우는 충북 음성에서 농사를 짓다가 4년 전 상경한 이래, 아현리 빈민가에 집을 얻어 방 한 칸씩 쓰고 있었다. 배구석은 석탄상점에서 일하는 가난하지만 선량한 노동자였다. 그러나 배구석의 지인인 엿장수 윤명구가 5월 11일 한창우의 딸 한기옥이 죽자,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들에게 뇌수를 먹이기 위해 배구석에게 뇌수를 꺼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배구석은 죽은 아이 사체로 산 아이 병을 낫게 해달라는 윤명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윤명구는 5월 15일 밤 한기옥의 무덤을 파헤쳐 머리를 베고 뇌수를 꺼내 한창우에게 주고 그 대가로 2원을 받은 것이다. 배구석이 검거되면서 서울 한복판에서 내뒹군 아이 머리를 둘러싼 대소동은 23일 만에 종결되었다. 그 후, 배구석과 윤명구는 분묘 발굴 및 사체훼손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배구석은 징역 4년, 윤명구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