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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부호 집안에서 일어난 살해사건! 이수탁 친부 살해사건!

2010-07-24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 사건!

익산의 부호 고(故) 이건호의 유산 백만 원에 가까운 황금을 중심으로 그의 첩 박소식과 그의 아들 이수탁, 이수탁의 첩 김영자가 공모하여 전기 이건호를 독살하였다는 전기 세 명에 대한 살인 사건은 재작년 5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손을 거처 동(同) 법원 이쯔이 예심판사의 담임으로 무려 2년 반 동안이나 죽은 지 3년이 넘은 시체를 발굴하여 해부하고, 해부한 그의 고깃덩어리를 이곳저곳으로 감정을 시키는 한편, 사건의 피고는 물론 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50명에 가까운 증인을 소환하여 심문하였으나 오히려 범죄를 구성할 만한 증거는 미약하여 사건 담임 이쯔이 예심판사는 사건의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하여 오는 11일 약 5일간 예정으로 사건 담임검사와 한 가지로 논산, 강경, 익산 방면에 출장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독살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병사냐? 하는 경계선에서 배회하고 있는 동 사건은 소설로도 진기한 소설의 모델이 될 만한 것이라더라.
- 동아일보. 1929년 12월 4일자

1924년 3월, 전라북도 익산의 백만장자 이건호는 감기로 몸져누웠지만 외아들 이수탁은 병든 아버지를 돌보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 바빴다. 병수발은 이건호의 첩 박소식과 이웃에 사는 형 이정호가 도맡았다. 이정호는 자기 건강도 돌보지 않고 한시도 동생 곁을 떠나지 않고 손수 약을 달여 먹이며 병 수발을 들었다. 양방, 한방을 가리지 않고 용하다는 의사는 모두 찾아가 약을 써 보았으나 짙어지는 이건호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지병인 천식과 해소까지 도져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병을 앓은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이건호는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건호가 마지막에 마신 탕약은 형 이정호가 준 처방전으로 아들 이수탁이 지어온 것을 이정호가 달인 것이었다. 큰아버지 심부름을 마친 이수탁은 시정잡배와 어울려 술을 마시며 노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이건호의 임종을 지킨 것은 이정호와 박소식 두 사람뿐이었다. 이건호의 주치의는 천촉해소(기침감기)에 의한 병사라는 사망진단서를 끊어주었다.

그러나 이건호가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1927년 5월, 그의 첩 박소식과 외아들 이수탁은 이건호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이건호의 탕약에다 아편을 섞어 독살했다는 혐의였다. 이쯔이 예심판사는 증거 확보를 위해 죽은 지 3년이나 지난 이건호의 시체를 파내 부검하고, 자작, 변호사, 경찰서장, 기생 등을 포함한 100여 명의 증인을 소환했다. 이로써 익산 백만장자 이건호 집안의 비밀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벼락부자 이건호는 누구?
이건호는 가난한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 고리대금으로 백만장자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돈 한 푼에 치를 떨고, 자기가 먹고 입는 것까지 아까워한 말할 수 없는 수전노로 돈을 모으기 위해 친척도 가정도 돌보지 않았고, 의리나 공익 같은 것도 따지지 않았다. 30대 후반에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으나 그때까지 아들이 없어서 고민했다. 39살 되던 해에 이건호는 박소식이라는 17살 소녀를 첩으로 들였다.

박소식은 소리꾼 아버지와 무당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미천한 소녀였지만,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미모를 지녔다. 박소식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이건호가 몸서리치도록 싫었지만, 부모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그의 첩이 되었다. 사랑하지 않는 나이 많은 남편에게 매일 밤 시달리는 것도 고통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이건호의 본처 조건식의 학대였다. 조건식은 시어머니보다 엄하게 박소식을 시집살이시켰다.

그리고 첩이 된 지 4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이수탁으로 박소식은 집안의 애물단지에서 백만장자의 유일한 상속자 이수탁의 어머니로 일약 수직상승했다. 서자긴 해도 마흔이 넘어서 본 아들 이수탁을 이건호는 끔찍이 사랑했고,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이수탁이 자라면서 이건호의 총애는 더욱 커졌지만, 비극의 씨앗 두 가지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이수탁은 이건호를 닮은 부분이 없었고, 늦게 본 자식을 너무나 총애한 나머지 버릇없는 철부지로 키웠다는 것이었다. 너무 버릇이 없어서 장난을 칠 때도 죽이겠다고 덤벼들기 일쑤였지만 이건호는 이수탁이 나이를 먹으면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수탁은 끝내 이건호의 기대를 저버렸다.

패륜아 이수탁
이수탁은 16살부터 주색을 탐닉해 재산을 탕진했다. 이수탁은 번번이 사기를 당했고, 빚을 끌어 썼지만 그때마다 이건호가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하지만 이수탁의 씀씀이는 백만장자인 아버지가 감당하기에도 벅찰 정도였다. 이건호는 급기야 법원의 선고를 받아 이수탁을 한정치산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정치산자가 되었다고 정신을 차릴 이수탁이 아니었다. 그의 방탕한 생활은 한정치산자가 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빚은 불어나 수십만 원에 이르렀다. 이수탁은 거듭 아버지를 찾아가 구제해달라고 사정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처럼 이수탁의 허랑방탕한 기질은 어머니 박소식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건호가 죽은 해인 1924년, 이건호는 형 이정호의 충고에 따라 이수탁을 호적에서 제적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수탁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고, 박소식이 간부와 정을 통해 낳은 자식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수탁의 호적 제적 문제가 논의된 직후 이건호는 감기로 몸져누웠고, 한 달 만에 사망한 것이다.

감기로 몸져누운 지 한 달 만에 사망했다는 것은 타살 혐의가 있지만 이수탁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기침감기에 의한 병사라는 사망진단서의 내용과 달리 이건호의 초상을 치르는 집안에는 괴소문이 떠돌았다. 이건호가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되었다는 것이었다. 괴소문의 진원지는 이정호였다. 그는 괴소문을 퍼뜨리는 한편, 죽은 아우의 장사를 치르는 와중에 이수탁이 첩의 아들인 서자이므로 이건호의 사후 양자를 따로 정하여 상속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양자는 자기 아들을 선택하면 된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사람들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망인의 자식 이수탁이 있는 이상 양자를 따로 세울 필요는 없다고 반대했다. 이정호의 입으로 새어나온 독살이란 말로 집안에 풍파가 일자 박소식은 망인의 시체를 부검하자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정호는 부검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그것은 자기의 일시 실언이었다고 잘못을 사과하고 사태를 허둥지둥 수습했다.

이수탁이도 아비의 주검 앞에 근신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수탁은 독살 의혹에도 아랑곳없이 제 나름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수탁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날 면사무소에 상속계를 냈다가 각하 당했다. 상주가 상중에 상속을 받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불복한 이수탁은 즉시 윤태진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상속 수속을 밟게 했다.

또한 박소식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다. 장례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이건호의 의복부터 태워버렸고, 묘지 설정을 반대하고 화장할 것을 요구해 물의를 일으켰다. 묘지 설정을 막아달라고 주재소에 300원의 뇌물까지 주었다. 이렇게 피붙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유산을 노리고 암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장례는 칠일장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3년 만에 불거진 이수탁 친부 살해사건
100만원에 가까운 재산을 모으고 굳게굳게 지켜오던 이건호가 황천객이 되자, 그의 유산을 상속한 이수탁 주위에는 경향 각처에서 몰려온 협잡배가 파리 떼처럼 들끓었다. 변호사, 경찰서장, 자작은 물론 이수탁 집의 머슴, 대서인, 이수탁의 본처, 큰아버지까지 포함된 여러 협잡꾼이 벌인 기상천외하고 추잡한 책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기가 먹고 입는 것까지 아까워하며 모은 이건호의 재산 100만원은 천치 자식을 둔 덕분에 죽은 지 불과 10달 만에 흩어졌다.

박소식은 사기당한 아들의 재산을 되찾고자 1926년 윤태진을 비롯한 협잡배 일당을 동대문경찰서에 고발했다. 이에 협잡꾼들은 자기들의 사기가 폭로될 것을 염려해 후환을 근절하려고 박소식, 이수탁 모자와 안 좋은 관계에 있던 이건호의 정처 조건식을 시켜 박소식과 이수탁, 김영자가 이건호를 독살했다고 맞고소하게 했다. 이로서 이건호가 사망한 지 3년 만에 이수탁 친부 살해 사건이 불거졌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고, 유일한 물적 증거는 땅속에 묻힌 지 3년이 지난 시체를 부검한 감정결과서였다. 그마저도 이건호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아편중독으로 죽은 것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해줬기 때문에 감정결과서도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일부 증인은 이건호가 평소에도 아편을 즐겼다고 증언하면서 자신이 먹고 죽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나왔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가 약에 아편을 탔다 해도 이정호가 탔는지 이수탁이 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증인 역시 궁색했다. 검찰 측 증인 태반은 이수탁의 유산을 사취한 협잡배의 일원으로 협잡배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또한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이정호는 예심기간 중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고소인 조건식도 1심 재판 중 늙어 죽었다. 이렇듯 분위기는 피고에게 유리했지만 무려 3년을 끈 1심 결과는 이수탁 사형, 박소식 무혐의로 끝났다. 이건호의 사망 전후 이수탁의 행동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형 판결에 이수탁은 재심을 신청했지만 2년을 끈 2심 재판 결과도 역시 사형이었다. 이수탁은 예심까지 합쳐 도합 세 번 죽은 셈이었다. 그러나 예심까지 무려 11년을 끈 법정 공방은 경성고등법원의 3심 재판에서 뒤집혔다.

변호사 심상봉이 기지를 발휘하여 아편 독살이라는 시신의 감정결과서가 증거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1심까지 변호인 심상봉은 협잡배의 음모임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지만, 복심 재판 결과마저 사형으로 끝나자 방향을 틀어 아편 독살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 이건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24년 3월 19일이고, 그의 시체를 부검한 것은 그로부터 3년 2개월 20일 후였다. 이렇게 오래된 시체를 부검해보고 아편 중독을 증명했으니 의문점이 없을 수 없었다. 심상봉이 자료를 수집한 결과 아편의 효능은 복용한 후 2년 6개월밖에는 존속하지 못한다는 것이 세계 의학계의 중론이었다. 이는 아편 독살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무효로 만드는 논거였다.
또한 임홍섭은 증인 심문에서 이수탁이 지어온 약을 먹이자 이건호는 갑자기 병이 중태가 되어 피를 두 사발이나 토하고 고통스러워했다고 했는데, 이는 의학지식으로 본 아편의 효능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 아편의 효능은 복용 후 피를 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피의 순환을 막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다량의 아편을 복용해도 피를 토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사건 결과, 이수탁이 아버지 이건호를 독살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수탁은 아버지 이건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독살보다 더 잔인하게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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