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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과 러시아 무역을 개척한 백만장자 최봉준

2010-08-07

한국과 러시아 무역을 개척한 백만장자 최봉준
백만장자 최봉준
본인이 1400톤급 화륜선 후시미마루(伏見丸)를 인수해 원산항과 성진항으로 일주일에 한 차례씩 왕래하옵는데 매월 소를 1000여 마리씩 매입할 터이오니 각처 우상(牛商)들께서는 원산, 성진 양처로 소를 가져와 팔아주시고, 세 항구를 왕래하는 승객께서도 많이 이용해주시기를 희망. 성진 준창호 최봉준 고백.
- 황성신문 1907년 4월 27일자 광고 -

요즘 한국에서 소 시세는 600kg짜리 수소 한 마리가 대략 600만 원 정도로 광고에서처럼 매달 1,000마리를 산다면 매달 60억 원 정도 융통된다. 지금 경제 규모가 100년 전에 비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당시 이와 같은 거금을 융통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인 중에서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개인자금으로 1,400톤급 화륜선을 인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배에 매달 1,000마리의 소를 싣고 성진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복했다.

또한 최봉준이 인수해 준창호로 이름을 바꾼 후시미마루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무용을 떨친 일본이 자랑하던 전함이었다. 최봉준은 실전에 배치된 지 40여 년이 지나 퇴역하는 일본 전함을 인수해 원산, 성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정기선으로 운항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도 차관을 얻어야 겨우 구입할 수 있었던 기선을 개인의 자금력만으로 인수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그의 재산은 엄청난 것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 백만장자가 되기까지...
당대 최고의 백만장자라 불리던 최봉준은 태어날 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1862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 외아들로 태어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세 되던 해에 전국적으로 큰 흉년이 들었다. 굶어죽은 주검이 거리에 나뒹굴었고, 산야에는 캐먹을 풀뿌리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고 국경 가까운 함경도 농민들은 남부여대해 두만강을 건너 만주, 연해주 일대를 유리했다. 최봉준의 부모 역시 정든 고향을 떠나 두만강 건너 연해주 일대를 유리하다 지신허에 정착했고,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키우던 소 한 마리가 전부였다.

지신허는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해 개척한 연해주 최초의 한인 마을이다. 최봉준 가족은 데려온 소를 쌀 4말과 바꿔 하루에 1~2홉의 쌀로 세 식구가 몇 달을 연명했다. 하지만 이듬해 봄 그의 부친이 사망했고, 이에 모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 국경을 봉쇄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 후 생활이 어려워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풀뿌리를 캐먹으며 근근이 버텼다. 굶어죽는 한인이 늘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구휼을 위해 한 사람당 밀 3말을 배급했고, 가까스로 기아에서 벗어난 두 모자는 삯품도 팔고 이삭도 주워 겨울을 넘겼다. 그 후 최봉준의 모친은 10살배기 최봉준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해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다. 감자 수확이 시작된 5월부터 두 모자는 겨우 굶어죽을 위협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악착같이 농사를 짓고, 틈틈이 삯품을 팔아 한 푼, 두 푼 저축해 2칸짜리 초가를 마련해 남의 집 행랑살이에서 벗어났다.

최봉준이 15세 되던 해에는 지신허 북쪽 추풍으로 이주했다. 황무지를 개척해 전답을 늘여갔지만, 그곳은 마적이 창궐해 생활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4년 후 장성한 최봉준은 모친을 모시고 연추 남쪽에 처선덕이라는 촌락을 개척했고, 자기 손으로 나무를 베고, 집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해 토지를 늘여갔다. 그리고 21세에 김씨를 아내로 맞았고, ‘탈시’라는 러시아 관직도 얻었다.

탈시는 현재 면장 정도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봉급이 많지 않았지만 최봉준은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 풍속을 개량하고,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고, 하천을 정비하고, 학교를 확장했다. 최봉준의 러시아 이름은 ‘최니콜라이’였지만, 한국인들은 그를 우두머리를 뜻하는 ‘최 반수’나 ‘최 노야’라 불렀다. 그리고 최봉준이 25세에 이르렀을 때는 추 일대에서 ‘최 노야’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망이 두터웠다.

한국과 러시아 무역 개척!
최봉준은 정규 교육을 한 차례도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독서를 통해 폭넓은 교양을 쌓았다. 34세가 되던 1895년에는 러시아 공직을 사임하고 연추로 이주해 러시아 군대에 쇠고기를 납품했다. 서양 사람들에게 소고기는 주식이기 때문에 사업은 안정적으로 성장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손꼽히는 부호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업이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897년 러시아 함대가 청국 영토 뤼순항에 나타나 무력시위에 돌입하자 최봉준은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빚까지 얻어 쇠고기를 매집했다. 또한 본격적인 군납 사업을 벌이기 위해 사무실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했지만 러시아와 청국은 교전 없이 3개월 후 여대조차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뤼순과 다롄을 조차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최봉준은 수만 원의 부채를 지고 도산 위기에 내몰렸다.

친구의 도움을 얻어 몇 년을 가까스로 버텼던 최봉준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이다.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군수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최봉준은 러시아 군대에 쇠고기와 군수물자를 공급해 단 1년 만에 50만원 남짓 수익을 얻었다. 이를 통해 연해주 한인 사회를 넘어 연해주 전체를 대표하는 사업가로 명성을 날렸다.
최봉준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기타큐슈, 상하이, 옌타이, 하얼빈, 원산, 성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대규모 무역업체 준창호를 설립했다. 그리고 후시미마루를 위시해 준창호로 개칭하고 3척의 기선을 도입해 해운업에도 뛰어들었다. 최봉준이 고용한 직원만해도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수백 명에 달했다. 최봉준은 사업뿐 아니라 경영난에 빠진 연해주 명동학교에 거금을 기부해 교육 사업을 벌였고, 연해주에서 간행된 최초의 한국어 신문 ‘해조신문’도 창간했다.

희대의 최고 갑부에서 필부가 되다
한‧중‧일‧러 4개국을 아우르는 무역망을 구축하려 했던 최봉준의 사업은 1908년을 전후로 총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했고,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후시미마루를 준창호로 개칭한 후 최봉준은 한국에서 매년 12,000마리의 소를 매입해 러시아 군대에 납품하고, 러시아에서 명태를 매입해 한국에서 매도할 계획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소 무역만으로도 매년 수십만원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러일전쟁 패전 이후 러시아는 극심한 내홍을 겪었고, 군대에 대한 투자가 패전 이전만큼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 역시 반일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최봉준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최봉준은 해조신문을 창간하면서 을사늑약 직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게재해 3개월간 옥살이를 한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했다. 해조신문은 매호 일본의 한국 침탈 야욕을 성토하는 사설을 실었고, 거사 전 안중근이 쓴 ‘인심결합론’을 싣기도 했다. 안중근이 처형당한 이후 최봉준은 안중근의 유족을 암암리에 지원했다. 이에 일본은 해조신문의 국내 반입을 금지했고, 폐간을 강요했다. 그리고 해조신문의 자금줄이었던 준창호의 사업 역시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다.

병합 직전 전국적으로 봉기한 의병도 최봉준의 사업에는 도움이 안 됐다. 경제활동 자체가 위축된 데다 의병을 가장한 도적떼가 상점의 물건을 훔쳐가기도 하고, 돈을 약탈해가기도 했다. 결국 러일전쟁으로 백만장자가 된 최봉준이 야심만만하게 설립한 준창호는 1912년 수만 원의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고 사업 개시 7년 만에 도산했다.

다시 적수공권으로 돌아간 최봉준은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추풍으로 돌아가 친구들이 마련해준 두어 칸짜리 집에서 낮이면 몇 이랑 밭을 갈고, 밤이면 성경을 읽으며 소탈하게 지내다가 1917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 무역왕, 해운왕의 찬사를 들었던 백만장자의 죽음치고는 초라해보였지만, 최봉준의 죽음에 연해주 한인 사회는 물론 함경도 도민, 멀리 미국 한인 사회에서까지 추모했다. 희대의 최고 갑부에서 하루아침에 필부로 돌아갔지만 사회를 위해 재산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최봉준의 죽음은 당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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