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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구한말 최대의 금광광산, 운산금광

2010-08-14

동양 최대의 금광, 운산금광
한국은 공식적으로 금이 생산되지 않지만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금 생산 국가였다. 한국의 금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890년대이다.

아국(我國) 산금액(產金額)은 재작년에 500여만 환이요, 작년에 600여만 환인데, 산액(產額)의 최다한 자는 운산금광이니 매년 약 300만 환을 산출하고, 그 다음은 순안금광이니 매년 약 30만 환을 산출한다더라.
- 황성신문. 1910년 2월 20일자 -

운산금광이 300만환, 순안금광이 30만환으로 그 차이가 무려 10배였다. 1910년 약 111만 달러의 금을 생산한 노다지 금광, 운산금광의 소유주는 한국 정부나 한국인이 아니라 뉴욕에 본사를 둔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였다. 1895년 미국인 모스가 한국 최대의 이권인 운산금광 채굴권을 손에 넣은 것은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의 주선 덕분이었다.

금광개발에 앞장 선 선교사 알렌
알렌은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국립의료기관 제중원을 설립하고, 외교관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1884년 조선에 입국한 이후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알렌은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광산을 담보로 미국에서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할 것을 고종에게 조언했다. 조선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이용해 개발하면, 양국 모두에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887년, 알렌이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 서기관에 임명된 후, 미국의 정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차관 도입과 광산 개발 문제를 논의했지만, 조선에 대한 미국인의 무관심과 오해로 실패했다. 1890년에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직한 이후에도 조선의 광산 개발 문제에 매달렸지만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청국의 방해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종전 이후,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자 알렌은 다시 광산 채굴권을 얻기 위한 교섭에 나섰다. 내각 요직에 포진한 친미파 인사들의 도움으로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광산 허가권을 가진 주무부서장 농상공부협판의 방해로 제동이 걸렸다. 이때 민 왕후가 지난 10년간 조선을 위해 봉사한 알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운산금광을 하사하라고 개입함에 따라 1895년 7월, 운산 일대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조선 국왕과 미국인 모스 사이에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개광회사’를 설립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운산금광 채굴권 따낸 조선개광회사
어렵사리 금광 개발권을 얻었지만 계약 당사가자 알렌이 아닌 모스였던 것은 당시 알렌의 신분이 미국의 외교관으로 자신의 명의로 주재국의 이권을 획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알렌은 당시 뉴욕과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모스가는 대 조선 무역에 관심을 두자 그를 교섭 상대로 내세운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알렌은 금광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스를 대리해 운산금광 채굴권 협상을 벌였다.

조선개광회사는 25년간 운산군 일대의 광구에 대한 독점적 채굴권을 부여받았고,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 대가로 고종은 회사 지분의 25%를 넘겨받았다. 실 공사의 말처럼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고, 알렌의 말처럼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정도였다.
그러나 모스는 좋은 조건에 훗날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성장할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차지했지만 광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도로도 제대로 깔리지 않았고, 번번한 설비조차 없는 운산금광을 개발하기 위해서 10만 달러의 자본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모스가 금광 개발에 의욕을 보이지 않자, 알렌은 시애틀의 사업가 헌트를 끌어들였다. 3개월 동안 운산금광을 면밀히 조사한 헌트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확인하고 모스를 상대로 채굴권 인수 협상에 나섰고, 모스는 단돈 3만 달러에 운산금광에 관련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본격적인 운산금광 개발에 나선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
1897년. 헌트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개광회사보다 자본금이 50배나 늘어난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는 첨단 광업 장비와 대대적으로 투입해 운산금광 개발에 나섰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첫해부터 운산금광은 엄청난 양의 금을 쏟아냈다. 하지만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가 극비리에 부쳐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50만~300만 달러 상당의 금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1899년, 헌트는 대한제국 황실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황제가 소유한 주식 25%를 10만 달러에 인수하고, 생산량에 상관없이 매년 12,000달러를 상납하며 계약 기간을 25년으로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황실은 무슨 이유인지 요구를 받아들였고, 두 차례 더 계약 기간을 연장해줘 계약 기간은 1954년까지 늘어났다. 동양광업은 1903년부터 이익 배당을 시작했다. 12.5%의 배당률로 지급된 첫해 배당금만 53만3000달러로 만약 대한제국 황실이 지분을 양도하지 않았다면, 이익 배당이 실시된 첫해에 13만3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실은 1년 배당금보다 적은 돈으로 지분을 모조리 넘긴 셈이었다.

주도권 장악을 위한 다툼의 장이 된 운산금광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동양광업과 운산금광은 건재했다. 일본 관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금광 채굴권을 환수할 구실을 찾았지만, 아무런 계약상의 결함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만큼 알렌을 비롯한 미국인들은 치밀했다. 동양광업은 매년 300만 달러 이상의 금을 생산했고, 단 1달러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배당이 처음 시작된 1903년부터 마지막 지급된 1938년까지 36년간 매년 10% 이상의 고율의 배당을 실시했고, 배당금 총액은 초기 투자금의 3배에 육박하는 1,438만여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이 금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면서 동양광업은 생산된 금을 일본 정부가 지정한 가격에 넘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익이 금갑하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마저 악화되자 동양광업의 경영진들은 몰수되는 상황까지 내몰리기 전 회사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1939년 동양광업은 대유동금광을 경영하던 일본광업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매각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증권시장에 상장된 동양광업의 주가는 12.5실링에서 35실링으로 폭등했다. 36년간 주주들에게 3배 가까운 배당을 안겨준 동양광업은 청산되는 순간까지 주주들에게 3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운산금광의 수익이 조선 사회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 운산금광은 수천 명의 조선인을 고용했고, 단순 노동자의 임금치고는 비교적 높은 50전 내외의 일당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익 대부분을 서양인 주주들에게 서둘러 배당했고, 조선에 세금은 단돈 1달러도 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 사회를 위하거나 조선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운산금광 개발을 미국의 이권 침탈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조선 정부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말이라 볼 수 잇다. 당시 조선 정부는 스스로 금광을 개발할 자본은 물론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열강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산업을 일으켜 자본을 축적하고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데 조선 정부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동양 최대의 금광, 운산금광은 조선의 무능함 때문에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외세의 다툼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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