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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철도 자립을 꿈꾼 철도왕 박기종

2010-08-21

철도 자립을 꿈꾼 철도왕 박기종
철도 건설을 위한 주체적 노력, 대한철도회사
오늘날 한국은 고속철도도 생기고, 세계적으로 철도 교통망이 잘 정비된 나라에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100년 전, 일본 철도는 한국보다 무려 27년 앞서 도입되었고,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등 한국의 간선 철도도 모두 일본인의 손으로 건설되었다. 그런 까닭에 철도는 외세 침략의 상징처럼 자리했다. 그러나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일요일에 철도 용달회사에서 임시 사무소를 남서 조동에 개설하고 이하영씨는 사장이요, 지석영씨는 부사장이요, 박기종씨는 사무장이요 이인영씨는 평의장으로 선정하였는데, 일간에 그 사무소를 남문 밖으로 이설한다더라.
- 독립신문 1899년 4월 18일 -

우리 스스로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설립된 철도용달회사의 정식 명칭은 ‘대한철도회사’로 실제로 경원선, 함경선, 경의선 부설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대한철도회사의 임원진 중 특히 사무장 박기종은 철도 자립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다. 실제로 1898년 부하철도회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대한철도회사, 1902년에는 영남지선철도회사 등을 연이어 설립하며 자기 손으로 한국에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꿈을 꿨다. 그러나 3차례에 걸쳐 시도했지만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철도 자립을 꿈꾼 박기종
박기종은 1839년 부산포에서 가난한 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얼마간 한문을 익힌 것을 제외하면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그의 고향 동래부에는 일본을 상대로 무역할 수 있는 특허를 받은 8명의 지정 상인, ‘팔상고(八商賈)’가 있었다. 박기종은 어려서부터 팔상고를 드나들며 일본 상인과 만나 일본어와 상술을 익혔고, 일본어가 능숙해지자 거간으로 나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30대 중반에는 부산 앞바다에서 어장을 경영하고, 김해 일대에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38세가 되던 해인 1876년, 평범한 장사꾼으로 살아가던 박기종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2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같은 해 5월 예조 참의 김기수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박기종은 일본어 통사로 발탁돼 수신사 일행을 수행했다. 20일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조선소, 제철소, 군사시설, 학교 등 다양한 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박기종은 철도와 기차에 충격을 받았고, 자기 손으로 한국에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1880년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 그는 다시 통사로 발탁돼 일본을 시찰할 기회를 얻었다. 두 차례에 걸쳐 통사로 수신사 일행을 수행한 이후 박기종은 용양위부호군이라는 무관 벼슬을 얻어 본격적으로 관계로 진출했다. 1885년, 부산과 원산 두 곳의 개항장에 경찰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박기종은 부산항 경찰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86년, 기선회사를 설립함과 동시에 부산항과 하단포를 연결하는 경편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부산항에서 6km 남짓 떨어진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하단포는 수운을 이용한 화물의 집합지였다. 아무리 단거리 경편철도라 하더라도 철도를 부설하자면 막대한 자금과 기술이 필요했다. 박기종은 유지들을 설득해 자본을 모으고, 차남을 일본 철도학교에 유학시키는 등 부하철도 건설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철도부설권을 놓고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 자본도 기술도 부족한 한국인이 철도부설권을 따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국인 최초, 철도 부설권 획득
1898년, 박기종이 외부 참서관에 임명돼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지지부진하던 부하철도 부설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박기종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그해 6월 그는 농상공부로부터 부하철도회사 설립 인가를 얻었다. 철도회사 설립 인가를 받은 박기종은 인허가 문제와 용이한 자본 조달을 위해 이재순이나 안경수 등 다른 사람을 사장 자리에 앉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철도는 여러 번 측량을 실시했지만,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자금 조달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수요 조사 결과 채산성을 맞추기 어려웠으며 측량 도중 경부철도 부설이 결정됨으로써 부하철도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후 대한철도는 경원선, 함경선, 경의선 부설권을 확보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계획대로 철도를 부설했다면 서울 이북의 간선철도 운영권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지만 박기종은 외국 자금의 도입을 거부하고, 순수 국내 자금 모금만 고집하다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특허 기간인 1년이 지나도록 공사를 착공하지 못하자, 경원선과 경의선 부설권은 궁내부 직할 철도국으로 환수되었다.

부하철도회사, 대한철도회사의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박기종은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2년 박기종은 영남지선철도회사를 설립하고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국내 자금만으로 철도를 부설하려다 자금난에 봉착에 두 차례 실패를 맛본 박기종은 일본과 자금 도입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은 차관 제공을 거부하고 부설권 양도를 요구했다. 자금 도입 협상이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자, 결국 박기종은 일본의 경부철도회사에 삼마철도 부설권을 매도하고 철도 부설의 꿈을 접어야 했다. 비록 철도 부설의 꿈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위 관리가 철도 자립을 꿈꾸며 여러 차례 철도 회사를 설립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 근대화를 위한 학교 설립
고위 관리로서 당시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축적했던 박기종은 관리로서의 출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철도회사 설립과 함께 학교와 회사를 설립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이에 장남인 박정규를 사도광산학교, 차남인 박창규를 철도학교에 유학시켜 일본의 선진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실제로 부산항 경무관으로 근무하던 1895년 부산 최초의 신식학교인 개성학교를 설립했다. 개성학교는 경성일어학당, 인항외국어학교에 이은 3번째 일어학교였다. 개성학교는 설립 이듬해 공립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매년 학부로부터 1,200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1,800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개성학교는 풍족한 자금을 바탕으로 동래일어학교, 마산포일어학교, 밀양개창학교, 경주계림일어학교, 기장일어학교 등 분교를 연이어 설립했다. 개성학교는 1908년 공립부산실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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