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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역사, 한일병탄

2010-08-28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역사, 한일병탄
한일병탄 조약 협상
8월 29일은 한일병탄 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 째 되는 날로 러일전쟁이 종전된 직후부터 한국은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상실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하고, 1907년에 군대 해산, 1909년 사법권 이양, 1910년 6월 경찰권마저 이양했기 때문에 합방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국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허울뿐인 독립마저도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은 당시 국민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짐이 동양평화를 확고키 위하여 한일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大)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 매일신보 1910년 8월 30일, 순종의 국권 이양 조칙


한일병탄 조약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가 데라우치 통감에게 한국 병합을 지시한 것은 1910년 8월 14일이었고,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이 합방 협상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인 8월 16일이었다. 8월 16일 데라우치 통감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관저로 불러 합방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위압과 조약 중 조약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조약의 형식을 빌리고 있을 뿐 국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셈이다.

데라우치가 제시한 합방 조건은 주로 합방 이후 황제와 황실, 고관들의 처우에 관한 것이었다. 합방 이후 황제 폐하는 태공전하, 황태자 전하는 공전하로 바꾸어 일본 황족의 예우를 받고, 기타 황족에게도 현재 이상으로 우대하며, 훈공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작위와 은사금을 내리고, 성실히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은 조선에서 제국 관리에 임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하고 복리를 증진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선언적인 규약일 뿐이었다.

이완용도 나름대로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합방 이후 한국의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고, 황제를 이왕전하, 태황제를 태왕전하, 황태자를 왕세자 전하라고 한다는 정도의 조건을 내걸었다. 실제로 이완용의 요구사항은 합방 조약에 반영되었다. 협상이 최종 타결된 것은 8월 18일로 데라우치는 일본 정부의 승인을 얻어 조약안을 제시했고, 당일 이완용은 내각회의에 조약안을 회부했다.

조약 체결의 마지막 관문, 어전회의
어전회의는 8월 22일에 열렸다. 어전회의 당일, 순종과 고종의 처소인 창덕궁과 경운궁 부근에는 2,600여 명의 일본군과 헌병들이 30m 간격으로 늘어서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시종원경 윤덕영은 순종에게 일본과 병합 준비가 끝났으며, 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위원으로 총리대신 이완용을 임명하는 어전회의가 필요하다고 알렸다. 순종은 이미 정해진 이상 속히 실행하는 것이 좋다며 당일 오후 1시 어전회의를 개최하겠다는 칙명을 내렸다.

어전회의에는 칙명에 따라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장 이병무, 황실 대표 흥왕, 이희,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입궐해 황제를 기다렸다. 순종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민병석과 윤덕영을 데리고 내전에 출어했다. 8월 18일 내각회의에서 유일하게 병합에 반대했던 학부대신 이용직은 수해위문을 명분으로 지방 시찰을 명령받았지만, 이질에 걸렸다는 핑계로 지방에 내려가지도, 어전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채 가택에서 칩거했다.

데라우치의 보고서 ‘한국병합시말’에 의하면, 9명의 참석자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순종은 흔쾌히 조약을 재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종이 어전회의에 자신이 지정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것을 보면, 흔쾌히 재가했다는 데라우치의 보고는 믿기 어렵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시종원경 윤덕영이 국권을 양여하는 조칙을 만들어 황제에게 어새를 찍을 것을 요청하자 황제는 흐느끼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침실로 들어간 틈에 몰래 어새를 찍어 이완용에게 건네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문에 근거한 기록으로 아직까지 입증할 자료는 없다.

어전회의가 열린 날 오후 4시에 총리대신 이완용은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대동하고 통감관저에서 전권위임장을 보여준 다음 준비된 조약문에 서명했다. 조약의 공포일은 애초 8월 26일로 정했지만, 그 다음날이 순종의 즉위기념일이었기 때문에 8월 29일로 확정되었다.

한일병탄 조약 무효 선언
지난 5월, 한일 지식인 1,000여 명이 한일병탄 조약 무효를 선언했다. 한 가지 근거는 조약의 내용에서 한국인의 자발적 요구에 의해서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한국인의 복리를 증진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형식적으로도 조약의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결함을 발견하기 어렵다.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체결된 조약은 비준에 해당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일본은 황제의 조칙문으로 비준을 갈음하려 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조칙문에는 어새는 찍혔지만 황제의 서명이 빠졌다. 조약 공포일까지 순종이 서명을 거부하자 데라우치는 어새만 찍은 채 조칙문을 공포한 것으로 보인다. 소위 ‘합방 조약’은 형식적으로도 무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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