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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과 일본의 한일병탄 과정

2010-09-04

한국과 일본의 한일병탄 과정
일진회의 합방 선언
일진회는 1904년 12월 송병준이 이끄는 독립협회 계열의 유신회와 이용구가 이끄는 동학 계열의 진보회가 ‘반정부’와 ‘친일’을 매개로 합동해 결성된 정치단체로 회원 수가 12만여 명에 달하는 최대의 정치 단체이다. 일본 군부의 비호를 받던 일진회는 통감부의 지원을 받던 이용완 내각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전개했다. 똑같은 친일파였지만 일진회와 이완용 내각은 성격이 달랐다. 일진회가 양반 계급 타파를 위해 일본 세력을 이용하려 했다면 이완용 내각은 양반 계급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일본 세력을 이용했다.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민당(民黨)을 표방한 일진회는 양반 내각, 문벌 내각을 상대로 한 권력 투쟁에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실패하자, 일본에 외교권을 영구히 양도하더라도 내각과 의회를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계략에서 합방을 청원한 것이었다.

일진회에서는 재작일 밤에 회의를 크게 열어 서울 회원 250여 명과 지방 회원 70여 명이 출석하여 한국과 일본을 합병하기로 결의하고, 작일에 대황제 폐하께 상주문을 봉정하고 소네 통감에게 건의서를 보내었다더라. 일진회에서 이번에 발표한 선어서는 우리 황실의 영영 존숭하는 기초를 공고히 하고, 우리 인민이 동등하게 대접받는 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보호국 관계를 벗어버리고 일본과 대등한 권리를 얻는 것이니, 그런 고로 법률상으로 정합방을 행하여 시세를 응함이 가한지라, 오후라! 이천만 국민이 살려 하여도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땅이 없는 비참한 지경을 당하여 노예로 대접받는 수치를 벗어버리려면 일본과 한국인이 동등 지위가 되는 데 있다 하였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5일 자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주장한 합방 이후의 정치 체제는 한국 황제와 내각이 존속하는 형태의 정합방국이었다. 외교권은 물론 내정에서도 일본의 간섭을 받는 보호국 상태에 머무는 것보다는 적어도 내정의 자율성은 확보할 수 있는 정합방국이 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용구가 제기한 정합방론은 일진회 내부에서도 통일된 의견은 아니었다. 일진회 고문 우치다와 다케다가 기초한 합방청원서는 한국 황제의 통치권 전부를 일본 황제에게 양도할 것을 주장했다.

합방에 대한 정치권의 대립
합방 문제는 한국의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 내에서도 민감한 문제였다.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즉각 합병을 운운하는 것은 일본에 부담을 주는 것이라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일진회 고문이자 흑룡회 주간인 우치다 료헤이를 중심으로 한 병합론자들은 이토의 온건한 대한 정책 때문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이토 통감의 퇴진과 급진적인 합방 운동을 전개했다. 이토 통감의 후원을 받는 이완용 내각과 조선 주차군 사령관의 후원을 받는 일진회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1909년 4월 10일 병합 단행을 결정하고, 이토 통감은 7월 15일자로 추밀원 의장으로 전임되었다. 일본에 체류하면서 한국문제 해결을 도모하던 이용구는 이완용 내각을 옹호하던 이토가 물러나자 대한협회, 서북학회 등과 연합하여 이완용 내각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 결과가 일진회의 합방성명서였다. 누구나 합방 문제가 공론화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공식적으로 합방, 병합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본 입장에서 일진회의 합방 선언은 비밀리에 진행되던 합방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의미가 있었다.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완용 내각에 대항하기 위해 일진회와 연합을 모색하던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3파 연합의 결렬을 선언했고, 통감부는 시기상조라는 이유에서 합방청원서를 반려했다. 이완용 내각도 일진회 방식의 합방에는 반대했다.

슬프다. 너희 일진회야. 너희는 홀로 대한국 인민이 아닌가. 5조약 때 불붙는 데 키질을 하였으며, 7협약 때 물결 이는 데 바람을 도왔으므로 일진회 석 자만 들으면 국민이 이를 갈거늘 오히려 부족하여 이제 또 일종의 괴이한 선어서를 지어내는가. 슬프다 너희 일진회야. 삼천리 강토가 다 파하고 이천만 생명이 다 죽으면 너희는 능히 홀로 살듯한가.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5일 사설

이완용의 합방성명서 반대
일진회의 합방청원서가 제출된 이후 이완용 내각은 즉각 조직적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합방보다 일진회 주도의 합방을 반대했던 이완용은 자신의 통역이자 비서인 이인직에게 일진회를 규탄하는 국민대연설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명을 띄고 도일해 도쿄의 각 신문, 재일유학생, 대한동지회 등과 교섭해 일진회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12월 22일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내각은 혼란에 빠졌고, 이완용은 이듬해 3월 말에도 정무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리고 1910년 4월 정무에 복귀해 물밑에서 일본 정부와 합방 협상을 벌였다.

내부대신에서 사임한 후 도쿄에 머물면서 합방 운동을 벌이던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이 합방에 반대하자 자신이 따로 내각을 만들어 합방조약을 체결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데라우치 신임 통감은 순종이 송병준의 조각을 재가하지 않을 때에는 합방이 지연될 것을 우려해 송병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데라우치 입장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구슬려 합방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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