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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즐기는 놀이인 화투, 투기로 전락하다!

2010-09-18

즐기는 놀이인 화투, 투기로 전락하다!
화투의 유입
1894년 개화당 정권이 집권한 이후, 1895년 3월 내아문에서 각 도에 88건의 규례를 훈시했다. 이 규례 제 46조에서 48조까지가 투전과 골패 같은 잡기를 엄금하는 내용으로 사회 개혁 차원에서 도박들에 대한 강력한 금지를 시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옛날부터 경향 각지에서는 투전과 골패라는 도박이 있었다. 이것은 마조와 강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 도박놀이는 자연히 중지되었는데, 수년 이후 일본인들은 서울과 각 항구에 화투국(花鬪局)을 설치하여 지폐를 놓고 도박을 하면서 한판에 많은 돈을 따고 잃었으므로 미련한 신사와 밑천이 적은 상인들은 파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일본인들은 또 요술을 잘 부리어 그 기교로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였으므로 도성에서는 절도가 매우 많았다.
- 황헌의 <매천야록> 1906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투전과 골패 같은 전통 도박이 금지되자, 일본에서 화투가 전래되었다.

화투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지만 화투가 전래된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이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 원산, 인천 세 항구를 개항했다. 이곳에 설정된 조계는 치외법권지역으로 일본 상인의 무역이 자유롭게 허용된 지역이었다. 일본 거류민들은 치외법권지역에서 매춘업소와 도박장이 개설되면서 화투도 함께 유입되었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화투가 한국의 투전에서 비롯된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투전은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 전래된 마조희라는 중국 도박에서 비롯된 것으로 18세기 이후 크게 유행했다. 그에 반해 일본의 화투 하나후다는 16세기에 시작되었으니 한국의 투전이 일본의 하나후다의 원조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16세기 포르투갈 선원이 서양의 카드를 일본에 소개했다 전해진다. 이것을 일본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 화투의 조상격인 가루타로 초기에는 5종 각 15매 총 75패로 구성되었다가 이후 4종 각 12매 총 48매로 변용되어 하나후다로 정착되었다. 100년 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도입된 화투는 일본이 서양의 카드를 변용해 하나후다를 개발했듯, 약간 변화가 생겼다. 한국의 화투는 11월이 오동, 12월이 비지만, 일본은 11월이 비, 12월이 오동이고, 1, 3, 8 등 광 패에 적혀 있는 광 글자도 하나후다에는 원래 없었다.

화투의 인기화투는 남녀노소 상하귀천 상관없이 폭넓은 계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도박이 금지되어 있어 사람들이 암암리에 화투를 즐겼다. 그러나 단속에 걸려도 서민들만 잡아가고 정작 판을 크게 벌이는 권력자의 화투판은 경찰과 군인이 경호를 설 정도였다.

과거 담뱃대를 금할 때 잡혀간 자는 하층민인 인력거꾼이나 가마꾼이나 말꾼이더니, 근일에 화투 노름을 금하는데, 잡혀가는 자는 가마꾼 아니면 지게꾼 아니면 아희들이라. 실상으로 말하자 하면 모모 대관 집에서는 큰판으로 잡기를 하매 거기는 순검과 병정이 파수를 하는지라. 별순검이 감히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니, 그러한즉 하류 사회 사람만 죄가 있고 상류 사회 사람은 잡기를 하여도 관계치 아니하다고들 하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13일

당시 상류 계층에서의 화투 인기도 대단했다. 고위 관료들이 화투판을 벌여 하루에 만금재물을 잃기 일쑤였고, 외국인에게까지 빚을 내 화투판에 날리기까지 했다. 특히 화투가 일본에서 전래된 도박인 만큼 친일 고위관료들은 대부분 화투를 즐겨했다. 대낮에 현직 총리대신 집에서 화투판이 벌어질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관료들의 화투판은 '도박중독자’ 이지용의 집에서 벌어진 화투판에 비하면 심심풀이에 가까웠다.

화투 대왕, 이지용
이지용은 화투로 너무 유명해서 ‘화투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가 화투로 구설수에 올랐다는 기사가 수십 건에 달할 정도로 사회적 물의도 많이 일으켰다.
- 중추원 고문 이지용씨가 근일 자기 집에서 화투판을 크게 벌이고 최진택씨의 돈 2만환을 빼앗아 먹었다고 헌병사령부에서 그 사실을 정탐하는 중이라더라. (신보, 1909. 4. 9)
- 중추원 고문 이지용씨는 일전 자기 집에서 화투판을 벌였는데, 어떤 시골 사람이 11만환을 얻었다더라. (신보, 1910. 3. 15)


이지용은 사도세자의 5대손으로 고종의 5촌 조카였다. 17세에 과거에 급제해 황해도 관찰사, 궁내부 협판, 주일 전권공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받는 등 결코 청렴한 관리는 아니었다. 1904년 일본공사관으로부터 운동자금조로 1만원을 받고, 외부대신서리 자격으로 일본공사 하야시와 한일의정서를 조인했다. 을사늑약 체결에도 적극적으로 찬성해 을사 5적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과다한 판돈을 걸고 화투판을 벌이다 물의를 일으켜 그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한일의정서 조인 대가로 받은 1만원도 대부분 화투판에서 날렸다.

이지용은 화투를 좋아한 정도라 아니라 도박중독 치료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1908년 이후 박의병, 김승규, 민영린 등과 어울려 밤낮없이 수만 환대의 화투판을 벌였다. 그의 자택은 전국의 노름꾼이 모이는 도박장으로 변했고, 그가 애지중지하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용산의 정자도 화투 빚에 넘어갔다. 1910년 6월에는 고관들과 어울려 화투를 치던 자택으로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도주하다가 얼굴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화투로 끊임없이 물의를 일으켰지만, 이지용은 합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강제합방 이후 백작 작위와 은사금 10만원을 하사받았다. 그 후에도 화투를 끊지 못했고, 1912년에는 지여땅이라는 화투를 치다가 체포돼 재판을 받고 귀족 예우가 정지되는 수모를 겪었다. 귀족 예우가 회복된 이후 그는 매년 3000원씩 나오는 귀족 수당으로 화투를 치며 소일하다가 1928년 사망했다.

도박 단속 포상금 제도
고위 관료들의 화투가 날로 심해지자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의정부 참정 신기선은 법무, 경무청에서 도박 단속을 강화하고, 몰수한 판돈을 체포한 관리에게 포상금으로 나눠주는 도박 단속 포상금 제도를 실시했다. 도박 단속 포상금 제도 이후 부녀자들과 하층민들에 대한 단속 실적은 좀 늘었다. 하지만 고위 관료들의 화투판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단속하는 순검들에게 포상금을 준다고 해도 현직 고위관료의 화투판을 단속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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