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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제강점기 입시전쟁

2010-09-25

초등학교 입학시험
보통학교는 요즘의 초등학교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각 급 학교는 수업료를 면제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교과서와 학용품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학생 유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191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경향 각지의 학교에 입학지원자가 쇄도해 지원자 모두를 수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 유일 전대 미문의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정원을 초과한 인원을 탈락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도입된 제도였다. 1910년대 후반 교육 환경이 열악한 지방에서 시작된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1920년부터는 교육 도시를 자부하던 서울에서도 실시됐다.

우리 집에는 올봄 만 일곱 살 된 아이가 있습니다. 만 여설 살이면 보통학교에 입학할 적령기라, 작년 수송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작년에 그만 낙제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린 것이 낙제했다고 낙심하며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원래 우리 애는 일곱 살이라도 다소 어린 맛이 있고, 신체 발육이 늦은데다가 체질이 허약합니다. 집의 할머님께서 늘 귀여워하셔서 그만 응석바지가 되었습니다. 머리도 그다지 총명한 편은 못됩니다. 그래서인지 작년 입학시험에 불합격되었습니다. 초등과정의 보통학교를 입학하는 데도 시험을 보게 한다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지만, 그 시험에 떨어진 다음, 여섯 살짜리 코흘리개가 언짢아하는 것도 부모 된 마음에 적잖이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 ‘중앙’ 1934년 4월호, 입학준비의 고심담

입학난을 완화시키려는 교육 당국의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건이 되는대로 학교를 지은 결과, 1919년 517개소에 불과하던 보통학교는 1935년 2,358개소까지 늘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4~5년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입학지원자를 모두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도와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초등학교 입시 경쟁률은 대체로 2:1 이상이었다. 심한 경우 6대 1을 넘는 학교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난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서울 시내에서 보통학교 들어가기가 다른 나라 대학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과열된 입시 전쟁, 중등학교 입학시험
‘입시의 꽃’은 단연 중등학교 입학시험으로 1937년 28,172명의 중등학교 입학지원자 중 합격자는 겨우 4,489명이었다. 전국 평균 6:1을 넘었고, 제일고보 10:1, 양정고보 11:1, 배제고보 13:1, 보성고보 12:1 등 서울시내 학교는 대부분 10:1을 상회했다. 겨우 13~14세 된 학생들이 적어도 4~5:1, 심하면 14~15:1의 살인적 입시 경쟁에 내몰렸다.

중학교 입시 경쟁이 치열한 만큼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1938년, 16세 소년 강하일은 중학교 재수생이었는데, 전국 평균 8:1을 상회한 중등학교 입학시험의 중압감을 못 이기고, 시험을 하루 앞두고 초조와 흥분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후 3시경 미친 듯 집을 뛰쳐나갔다. 강하일은 가출 5시간 만에 금화산 근방에서 실성한 상태로 발견됐다. 이튿날, 강하일은 2년 동안 준비한 시험을 치르는 대신,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강하일 외에도 입시의 중압감에 답안지에 혈서를 쓰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입학난 시험지옥의 악착스런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불상사가 청진상업학교 신입생 시험장 안에 더구나 감독자의 감시를 받고 있는 그 자리에서 발생했다. 천진스러운 어린 수험생이 칼로 자기의 손을 베이고 피를 짜내어 시험지에 혈서를 써서 시험관에게 제출한 놀라운 사건이다. 혈서의 내용은 만일 이 시험에 낙제하는 경우에는 자살하고 말겠다는 것으로 작문시간에 연필 깎는 칼을 꺼내가지고 왼편 손등을 갈라 흐르는 피를 시험 답안지에 쓴 것이라 한다. 사건 발생 직후 학교 당국자들은 사태의 변태적인 성격에 크게 놀라 일체 함구하고 극비에 부쳤다. 당국자들은 시험의 결과를 기다려 대책을 강구하기로 뜻을 모았는데, 지난 9일 해당 학생이 불합격한 것으로 최종 판명되자 갑자기 동분서주했다. 혈서의 내용대로 해당 학생이 비관한 끝에 탈선행동을 할까 우려해 교장이 벌써 몇 차례 찾아가 위문했고, 경찰은 그의 신변을 힘을 다해 경계하고 있다.
- 조선일보, 1937년 5월 12일

입학시험이 치러지는 3월이면 입시 실패를 비관해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1931년 16세 김재기가 쥐약을 먹고 자살하고, 1933년 양산보통학교 5학년생 이창석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 1935년 19세 윤학병은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 1936년 17세 김홍배는 벼랑에서 투신자살, 1938년 16세 이해정은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 , 1940년 18세 정정모는 다량의 칼모틴을 마시고 자살하는 등 자살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으며, 아들의 입시 실패를 비관해 투신자살하는 부모도 있었다.

정부의 입시 완화 대책
입학난이 사회 문제로 비화되자 총독부도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34년 12월, 총독부는 입학난 해소를 위한 ‘획기적’ 조치를 단행했다. ‘입시준비교육철폐’라는 이름의 조치에서 총독부는 초등학교에서 중등학교 입시교육을 금지하고, 중등학교 입시과목을 국어와 산술 두 과목으로 제한하며, 초등학교 교장이 작성한 소견표를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하게 했다. 그러나 경쟁률이 10:1이 넘는 시험을 앞두고, 학교에서 입시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수험생들이 입시준비를 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시험과목을 축소한다고 해서 경쟁이 줄어들 리도 없었다. 결국 총독부의 ‘입시준비교육철폐’ 조치는 세인들의 비웃음만 살 뿐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첫 번째 대책에 실패한 총독부는 2년간의 연구 끝에 1936년 12월 또 하나의 ‘획기적인’ 입시 안을 내놓았다. 암기를 중심으로 한 주입식 교육을 철폐하고 각자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계발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이 입시 안은 과거 학력한 가지만 가지고 평가하던 것을 신체검정, 학과시험, 구두시험, 출신학교장 소견표의 4가지로 전형 요소를 다양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계발교육이 실시된 이후 학생들은 학과공부 외에 구두시험을 대비한 군국주의 이념 학습과 신체검정에 대비한 체력단련 부담까지 떠안아야 했다.

일제강점기의 살인적 입시 경쟁 근본 원인은 학교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입시 제도를 아무리 뜯어고쳐봐야 학생들의 부담만 가중될 뿐이었다. 오늘날은 대입 희망자보다 대학 정원이 많지만 여전히 입시 경쟁이 치열한 것은 대학 정원만 많지 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의 정원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열된 입시 경쟁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입시 경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그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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