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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을 대표하는 신여성, 박인덕

2010-12-11

박인덕의 유학생활
신여성 박인덕은 1926년, 남편과 두 아이, 노모를 두고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있던 박인덕 여사는 오는 20일에 다년간 숙망이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아주 웨슬리언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사는 김운호씨의 부인이요 두 아기의 어머니요, 칠십이 되신 홀어머니의 따님이십니다. 여사가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두 따님, 늙은 어머님을 떠나 얼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밟게 된 것은 여사의 마음 가운데 “조선 여자 사회를 위해 좀 더 잘 배운 일꾼이 되어보자.”하는 결심이 얼마나 깊은지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박인덕 여사는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습니다.
“미국 유학은 벌써 여러해 전부터 계획했던 것이올시다. 남편은 일본으로 공부를 가게 되었고, 두 어린아이는 시어머니께서 맡아 기르시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어린아이를 떠나가는 것이 매우 섭섭하나 삼사년의 세월이란 금방 지나가리라고 믿고 그때에는 희망과 이상으로 가득 찬 재회가 우리를 맞을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오직 기쁜 그 미래를 생각하고 현재의 떠나는 슬픔을 잊으려합니다.”

- 동아일보, 1926년 7월 16일

당시 31세던 박인덕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 3년 만에 웨슬리언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에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대학원에 다니던 1928년 가을부터 1931년 봄까지 국제기독교청년회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32개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가졌다. 컬럼비아대학, 캠브리지대학, 파리대학 등 구미 유수 대학에서 가진 순회강연회는 260회에 달했다.

미국 유학 6년 간 박인덕은 조선 여성계를 넘어 세계 여성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박인덕이 세계 일주 여행을 마치고 평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나타났을 때, 사회의 관심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귀국한 박인덕에게 쏠린 세상의 관심은 그가 이룩한 엄청난 성공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궁금히 여긴 것은 그가 집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였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신여성, 박인덕
박인덕은 이화학당에 다닐 때부터 '노래 잘하는 박인덕', '연설 잘하는 박인덕', '인물 잘난 박인덕'이란 평판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인물 많기로 소문난 이화학당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3․1운동 때에는 모교인 이화학당의 기하, 체육, 음악 담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돼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 열사가 그의 제자다. 그의 미모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전해지는데, 박인덕의 재판을 맡은 일본인 재판장이 그의 미모에 반해 반일의식만 없었으면 청혼했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화학당 외국인 선교사들은 박인덕에게 미국 웨슬리언대학으로 유학을 주선했다. 그러나 박인덕은 머뭇거리다가 끝내 제안을 거절했다.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까지 포기하면서 박인덕이 선택한 것은 김운호와의 결혼이었다. 김운호는 배재학당을 마친 잘생긴 청년부호였지만 이미 아내를 둔 유부남이었다.

당시 사회는 유부녀와 처녀가 결혼하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인덕이 김운호와 결혼하려 한 것은 김운호가 박인덕의 노모를 극진히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박인덕의 아버지는 평생 글만 읽은 선비였다. 돈 벌 생각도 없이 오직 글을 읽으며 평생 과거 준비에만 매달렸다. 박인덕이 태어나던 해 과거가 폐지되자, 신세한탄만 하다가 박인덕이 7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박인덕의 어머니는 딸자식도 공부를 시키면 아들 못지않다는 이웃의 말을 듣고 어린 딸에게 사내 옷을 입혀 서당에 다니게 하고, 진남포에 삼숭학교가 생기자 신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박인덕은 삼숭학교 졸업 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박인덕의 불행한 결혼생활
김운호는 13세에 서울 동막에 사는 부호 이씨의 딸과 결혼하여 10여 년간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았다. 박인덕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홍수동에 박인덕과 같이 살 신혼집을 짓는 동안에도 아내 이씨와 한 이불을 덮고 지냈다. 박인덕은 결혼 조건으로 본처인 이씨와의 이혼을 요구했고, 이에 김운호는 이씨와의 10년 부부 연을 초개와 같이 내던졌다. 구여성 이씨는 신여성 박인덕에게 부잣집 안방마님 자리를 내주고 동막 친정으로 쫓겨났으며, 친정이 기운 후에는 남의 집 침모가 되어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했다.

박인덕의 결혼은 시작부터 축복을 받을 수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후, 박인덕은 어느 음악회의 간청으로 피아노 연주자로 무대에 섰다. 그러나 청중이 야유를 퍼부어 피아노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채 울면서 퇴장했다. 그날 저녁부터 무려 7개월간 박인덕은 두문불출하고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인덕의 진짜 불행은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아니었다. 결혼 한 지 한 달 만에 김운호의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인사동 택시회사, 관철동 병원, 종로 요리집이 차례로 도산했다.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자 박인덕은 결혼 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동대문 밖 저택과 피아노를 처분했다. 그렇게 살림을 줄여 시내로 들어와 이곳저곳으로 전전하다가 김운호의 모친이 사는 아현리 옛집으로 들어갔다.

경제적 풍요 하나 바라보고 한 결혼은 박인덕을 결혼 전보다 더 심한 경제적 곤궁 속에 빠뜨렸다. 김운호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박인덕은 다시 직업전선으로 나가 남편과 두 딸,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부양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두 곳 출강하는 것으로도 딸린 식솔을 다 벌어 먹일 수 없어 윤덕영 자작 집에 가정교사까지 다녔다. 박인덕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김운호는 지난 시절 부귀영화를 추억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결국 박인덕은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유학 중에도 박인덕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장학금과 강연료를 모아 매달 2~30원씩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에게는 한 푼도 주기 싫었지만, 무능하고 이기적인 남편에게 맡겨둔 두 딸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박인덕이 돈을 부쳐줄 때마다 김운호는 편지를 보내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한국 역사 최초, 이혼 여성
박인덕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이혼을 요구했다. 김운호는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미국에 있는 동안 박인덕에게 남자가 생겼을 것으로 의심했다. 그리고 자식 양육을 대가로 집요하게 돈을 요구했다. 결국 박인덕은 귀국한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인 1931년 10월 26일, 공식적으로 이온했다. 박인덕이 김운호에게 위자료 2,000원을 주고, 두 딸의 양육권은 박인덕이 가지는 조건이었다. 김운호와의 이혼으로 박인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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