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평양을 공포로 몰아넣은 사형수 심종성의 탈옥

2010-12-18

탈옥한 사형수, 심종성
1931년 1월, 사형수의 탈옥 소식으로 평양 시민이 공포에 빠졌다.

16일 오전 12시 30분경, 평양복심법원에 재판 받으러 갔던 강도 살인죄수가 간수의 칼을 가지고 도망한 사건이 생겼다. 도주한 범인은 강도 살인죄수 심종성으로 1심에서 사형의 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그날 복심 판결을 받고자 출정을 하였었는데 피고가 관선변호사를 마다하고 다른 변호사를 세우겠다고 하여 부득이 공판을 21일로 연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퇴정한 피고를 재판소 유치장에 수갑을 채운 채 넣고 조선인 간수 한 명은 다른 죄수를 데리고 가고 남아 있던 일본인 간수 한 명이 지키고 있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칼을 벗어두고 간 틈을 타서 피고는 수갑을 찬 채 순사의 칼을 가지고 그만 유치장 문을 차고 도망하였다 한다. 도망간 것을 발견하기는 동일 오후 2시 30분이었음으로 그 사이 언제 도망갔는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 한다. 죄수가 도망간 것을 발견한 간수는 낭패하여 이를 보고하자 형무소 당국은 물론 평남경찰부를 필두로 평양경찰서와 대동경찰서에서 비상소집을 하여 수사반을 조직하고 시내와 인근 각처에 물샐 틈 없이 경계망을 늘리고 범인 체포에 노력하는 중이다.
- 동아일보, 1933년 1월 17일

정육점 부부 살해자, 심종성
심종성은 1931년 10월 새벽에 평양 선교리에 있는 한 정육점에 새벽에 식칼을 들고 침입해 잠든 부부를 목 졸라 살해하고 현금 3원과 100원 상당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가 체포되었다. 평범한 월급쟁이 두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100원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큰돈도 아니었다. 한밤중에 훔친 물건을 보따리에 싸서 도망치다가 경찰의 검문에 걸렸는데, 보따리에 든 게 뭐냐고 물으니 이삿짐이라고 말했다. 꼭두새벽에 남자 가 이사한다는 말을 수상히 여긴 순사가 보따리를 풀어볼 것을 요청하자 그 남자는 보따리를 집어던지고 도망쳤다. 그러나 추적한 순사에 의해 괴한을 붙잡았다.

심종성과 정육점 부부는 알던 사이다. 심종성은 1891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서 탈주 당시 43세였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난 심종성은 넉넉지는 않았으나 먹고살기는 곤궁치 않은 형편이었다. 하지만 도박에 빠져 재산을 다 탕진했다. 심종성에게는 14세 연하의 첩이 있었는데, 첩이 정육점 주인과 바람이 난 것이다.

심종성은 강도짓을 해서 도박 자금을 마련했는데, 바람난 첩이 신고해서 강도죄로 7년 복역을 했다. 그동안 첩이 정육점 주인과 살림을 차린 것이다. 원래부터 심종성은 두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정육점 주인에게 돈을 뜯어내려 했으나 완강히 거부하자 직접 정육점을 털어서 가져가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정육점에 칼을 들고 찾아가서 협박해도 돈 숨긴 곳을 말해 주지 않고, 한때 자신의 첩이었던 정육점 주인의 정부는 비명을 지르며 반항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심종성의 탈주 경로
심종성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해서 2심 재판을 받던 중 탈옥했다. 심종성은 계획하고 탈주한 것이 아니었다. 간수가 실수로 자물쇠를 잘못 잠가서 유치장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종성이 탈옥하고 난 후, 일주일 동안 그의 행적이 묘연했다. 무장경찰에 헌병대까지 동원해 평양 시내는 물론 평안도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심종성은 탈주 후, 곧 후회했다. 계획적인 탈주가 아니기 때문에 갈 곳도 없고, 날씨까지 추워서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1월 17일, 밤새 걸어 겨우 동사를 면한 심종성은 날이 밝자 대동군 금제면 장현리로 내려왔다. 길거리에 엿장수의 엿판이 놓여 있었다. 하루를 꼬박 굶은 심종성은 2원어치나 되는 엿판을 통째로 훔쳐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강서군 태면 제촌리로 들어갔다. 그날 밤도 밤새도록 걸어서 가까스로 동사를 면했다.

1월 18일에는 하루 종일 걸어서 평원군 청산면 청용리로 들어갔다. 빈 방앗간이 있어 사흘 만에 새우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방앗간이라고 춥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얼어 죽을 염려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다 탈주 8일째 되던 날, 외삼촌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갔다가 숙모의 신고로 검거되었다.

탈옥수 심종성 검거
심종성은 체포될 때 방한모를 쓰고, 검정색 덧저고리와 회색 바지 위에 다시 흰 바지를 덧입었고 조선버선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영하 20도나 되는 추운 밤을 8일 간이나 노숙한 관계로 온몸에 동상을 입어 발음도 분명치 않았다. 평원경찰서에 유치된 상태로 치료 중인데 총상과 동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평양으로 호송되리라 한다.
- 조선일보, 1933년 1월 26일

심종성은 체포된 지 이틀 후 평양경찰서로 호송되었다. 8일 동안의 굶주림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엄청난 양의 밥을 먹어치웠다. 발목에 경미한 총상을 입었을 따름이지만 경찰에서건 검찰에서건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아파서 앉아 있을 수 없다며 드러누워 신문을 받았다.

8일 동안의 탈주 행각으로 심종성에게는 기존의 강도, 살인, 절도죄에 도주죄와 엿 2원어치를 훔친 절도죄가 추가됐다. 하지만 두 사안을 추가로 기소하면 1심 재판부터 다시 열어야 했다. 검사는 추가로 기소하던 기소하지 않던 재판 결과가 사형이긴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 도주, 절도죄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심종성은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5월 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마저 기각해 6월 27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