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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0년 전 세밑풍경

2011-01-01

1910년, 세밑풍경
한 해를 돌이켜 보면 기쁜 일보다 슬픈 일, 잘 된 일보다 잘못된 일이 더 많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융희 3년인 1909년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해이고, 1910년 새해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첫해인지라 조선의 새해는 침울하고 침통한 분위기였다. 1909년을 생각해보면, 기쁜 일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 ‘액년’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인생은 잠깐이요 세월은 여류(如流)로다. 융희 3년은 겨우 하루가 남았으니 이때 이 사람의 감정이 실로 무궁하리로다. 머리를 돌려 지난 1년 동안을 생각해 볼진대 1년 12달 365일에 어느 달이 액달이 아니며 어느 날이 액날이 아니런가.
금년 1월 이후로 국사는 날마다 어려워지고 민생은 더욱 곤란해지고, 황상께서 서도에 순시하시는 길에 일본 기를 날렸으며, 황상의 어가가 통감부에 자주 임하셨으며, 교육을 구속하여 인민의 애국정신이 억눌렸으며, 서책을 출판하는 것을 제한하여 인민의 사상을 발표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병권이 날아가서 군부가 폐지되었으며, 법부를 폐쇄하였으며, 충의 있는 선비가 횡액을 당하여 비참한 일이 다단하였으며, 한국과 일본의 불량 지도자들이 합방 문제를 창론 하였으며, 인민이 모두 굶어죽고 얼어 죽게 되었으며, 천만가지 비통한 경황이 밀려와서 수치와 능욕과 고통과 참악함이 날로 때로 심하였으니 오호라!
융희 3년은 한국의 액년이로다. 그러나 이왕 지난 일을 어찌할 수 없거니와 장래 일은 오히려 가히 하려 들면 되는 것이니 동포들이 과연 금년으로써 명년을 경계할진데 가히 명년으로 하여금 대(大)길년을 만들지니 이로써 미리 하례하노라. 이제 우리는 붓을 잡고 우리 이천만 동포와 함께 이 한국의 큰 액년 융희 3년을 배송하노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30일 <묵은 액을 배송함>

정치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출판법 공포(2.23)로 사상과 출판의 자유가 제한되고, 군부 폐지(7.31)로 병권을 잃고, 법부 폐지(11.1)로 사법권을 상실하고, 12월 8일 일진회에서 합방 청원서를 발표했다. 재정 피폐로 국민이 모두 굶어죽고 얼어 죽게 된 융희 3년은 말 그대로 ‘액’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 논설은 “동포들이 금년으로써 명년을 경계할진대 가히 명년으로 하여금 대길년”을 만들 것이라 희망했지만, 이듬해 세모에는 대한제국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세밑을 보내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모두에게 슬픈 것은 아니었다. 1909년이 대한제국에게는 어려운 한 해였다면 일본총독부 소네 통감에게는 하는 일이 모두 잘 풀린 한 해였다. 그래서 1909년의 한해를 마무리하는 송년회를 열어 즐겼다.
“소네(曾彌荒助) 통감은 작일 오후 7시에 망년회를 설(設)하고 각부 대신과 내외국 고등관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 (신보, 12.30)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지난 토요일 동기(冬期) 휴학식을 거행하고 강사 제씨는 그날 하오 8시에 혜천관에서 망년회를 행하였다더라”
(신보, 12.28)

또한 극소수 친일파들에게는 상여금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들뜬 분위기에서 새해를 맞았다.
“각부 차관의 연말 상여금을 각부 경비로 천환씩 지급하였다더라.” (신보, 12.28)
“삼작일 하오 3시에 한성위생회에서 시무하던 순사에게 상여금을 35환에서 10환까지 지급하였다더라.” (신보, 12.30)

1909년 연말 사건사고
세밑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사건사고도 줄을 이었다. 일본인 도굴꾼 5명이 경기도 장단군에서 고려총을 파고 자기를 도굴하다가 검거되었고, 조형구와 황범수가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은전을 위조하다 체포되었다.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시장세 징수에 반발해 철시 투쟁을 벌이던 상인 수백 명은 체포된 동료 3명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했다.

세밑과 상관없이 일본의 국권 침탈과 그에 대항한 의병 항쟁도 지속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간행돼 국내에 유입된 신한민보가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압수되었고, 서울 주재 일본 신문기자단은 합방 선언서와 결의문 수천 벌을 인쇄해 일본 내각을 비롯한 각처로 발송했다. 의병장 이진용은 황해도 평산군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했고, 전라북도 덕유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사임을 비롯한 의병 11명은 일본 헌병에 피착되었다.

1910년 새해 소망은 국권 회복
침울했던 1909년 연말을 보낸 한국인에게 가장 큰 소망은 국권 회복이었다. 요즘과 같은 평화시기에는 통일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소망은 다소 공허하게 들리고, 오히려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자식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으면 좋겠다는 등 개인적 차원의 소망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1909년처럼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는 국가적 차원의 소망이 더 간절하게 다가왔다. 국가란 공기와 같아서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다가 없어지면 그것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까마귀 가는 곳에 옥토끼도 급히 뛰어 / 융희 3년 다 지나고, 융희 4년 돌아온다 / 비나니, 송구영신 제일곡의 국권 회복”
- 대한매일신보, 12월 30일 <시조, 제일곡>
양력으로 맞는 첫 번째 세밑
조선 시대는 중국의 연호와 태음태양력에 바탕을 둔 시헌력을 사용했다. 예컨대 1875년은 시헌력에 따라 을해년, 청국 광서제가 제위에 오른 광서 원년 등으로 불렸을 뿐, 1875년이라는 시간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항장에 이주한 일본인과 서양인들은 그들이 만든 우체국, 병원, 은행 등에서 태양력을 사용했다. 공식적으로 시헌력을 사용하던 한국 정부도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순보에 개항장의 일본 기선 왕복 시간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수록거나, 해관에 근무하는 서양인 직원에게 일요일 휴무를 주는 등 태양력과 요일제를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태양력은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6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청국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정삭(正朔: 책력)을 개하야 태양력을 용하되 개국 504년 11월 17일로써 505년 1월 1일을 삼으라.” (승정원일기, 고종 32년 9월 9일)
태양력의 채택은 중국 중심의 시간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국가적 제례나 기념일은 한동안 시헌력을 기준으로 시행되었다. 태양력과 시헌력이 동시에 사용되다 1909년에 태양력으로 통일되었다. 즉, 1909년 12월 31일은 태양력으로 세밑을 맞은 첫 번째 세밑이었던 것이다.

양력과 음력이 혼란스러웠던 만큼 해를 지칭하는 연호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황성신문은 1910년을 단군개국 4243년, 기자 원년 3032년, 대한 개국 519년, 융희 4년, 구력 경술, 일본 명치 43년, 청국 선통 2년, 서력 1910년 등 8가지 다른 연호로 표기할 정도로 정치적 상황만큼이나 시간 체제 역시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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