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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나석주 의사

2011-01-08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나석주 의사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지다!
1926년 12월 28일,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바로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석 사건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한국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일본이 세운 경제 침탈 기관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12월 28일 오후 2시경부터 동 30분까지 백주에 시내 남대문통 2정목 조선식산은행과 황금정 2정목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또 권총을 난사하여 동척 사원과 경관 등 일본인 일곱 사람을 살상한 후 범인 자기도 권총으로 자살한 근래에 전례 없는 중대 사건이 있었는데, 당국에서는 사건의 내용이 비범함을 알고 즉시 신문에 게재를 금지하고 검사국과 연락하여 대대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중에 있었었다. 이에 대하여 그 동안 본사에서는 그 내용에 저촉되는 않는 범위 내에서 단편적으로 그 사건 관계 사실을 보도하여 온 바 있었는데, 당국으로부터 금일로써 해금이 되었음으로 그 동안 사건의 발생과 그 경과의 대략을 우선 호외로써 보도하는 바이다.
- 조선일보, 1927년 1월 13일

오후 2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사옥으로 들어갔다. 수위가 제지하자 이영우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설명했고, 수위가 없다고 하자 그냥 돌아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나온 후, 전찻길 남쪽으로 돌아 남대문통 조선식산은행 본점으로 들어갔다. 연말인데다 연휴 끝까지 겹쳐 은행 창구는 대만원이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원래 공휴일이 아니었지만 다이쇼 일왕이 사망하는 바람에 26일까지 임시공휴일이었고, 27일은 일요일이었다. 은행원들은 한꺼번에 몰려든 고객에 치여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혼란한 틈에 나석주가 폭탄을 투척했지만, 불발탄으로 끝나 피해는 없었다. 즉,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나석주가 처음 폭탄을 던진 곳은 조선식산은행이었던 것이다.

이후 오후 2시 15분, 나석주는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수위실에 앉아 있던 잡지기자 다카키를 총으로 쏘고, 구내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다케지를 쏘아 제압하고, 2층 토지개량부로 들어가 직원 오모리와 야마다를 쏘고, 폭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또다시 불발탄이었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 조선철도 수위 마쓰모토, 천진당 시계점 점원 기무라 저격 살해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빠져 나와 도주하던 중 경기도 경찰부 소속 다바다 경부보까지 살해했다. 그리고 경찰에 포위되자 가슴에 총 3발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다.
동척 사옥 내부와 동문 밖 그리고 황금정 2정목 길거리 등 사건 현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연출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마경관과 무장경관들이 삽시간에 황금정 일대를 에워쌌다. 실내와 길 위에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피해자들을 들것과 자동차에 실어 잇따라 병원으로 옮기는 광경은 전쟁터와 같은 아수라장이었다.
다바다 경부보는 총알이 심장을 관통해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절명했고, 머리에 총을 맞고 문 밖 돌계단 위에 쓰러져 있던 수위 마쓰모토와 가슴에 총을 맞고 길 건너편 나카니시 자전거포 앞에 쓰러져 있던 시계점 점원 기무라는 총독부병원으로 옮겨 치료했으나 끝내 절명해 사망자는 도합 3명이었다.
- 동아일보, 1927년 1월 14일

경제 침탈의 첨병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일본인 서민도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슴에 두 군데 총상을 입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동척 사원 다케지, 가슴에 관통상을 입은 동척 토지개량부 기술과 차석 오모리는 총독부병원으로 옮겨져 사경을 헤매다 겨우 회복되었다. 조선부업회 기자 다카키도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총탄이 폐와 심장 사이로 피해간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동척 토지개량부 기술과장 야마다는 오른팔과 가슴에 총상을 입었지만, 총알이 갈비뼈에 맞은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자살을 시도한 나석주는 세 발이 총탄 중 두 발은 관통했고, 한 발은 폐에 박혔다. 출혈이 심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때까지 나석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테러리스트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일본 경찰은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나석주에게 캠퍼 주사를 놓아가며 신원과 배후, 동기를 캐기 위해 독려했다. 그러나 나석주는 자신의 이름만 밝혔을 뿐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 함구한 체 사망했다.

폭탄은 왜 터지지 않았나?
나석주의 사망 후 드는 의문점은 왜 폭탄이 터지지 않았냐는 것이다. 경찰은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던진 폭탄이 불발로 끝난 것은 안전핀을 뽑지 않고 던졌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다년 간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단체에서 활동한 나석주가 안전핀을 뽑지 않고 폭탄을 던지는 실수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저질렀다는 것에 의혹이 제기되었다. 나석주가 실제로 안전핀을 뽑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중국에서 지니고 온 폭탄 자체에 하자가 있었을 개연성이 더 크다.

나석주 의사
나석주는 독립운동가로서 1890년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에서 자영농 나병헌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17세 되던 해에 마을 유지들이 세운 보명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던 해에는 보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가 설립한 양산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훗날 김구는 나석주를 제자이자 동지라고 일컫기도 했다. 나석주는 대대로 이어오던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기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소작료 인하 투쟁을 전개하다가 소작지 빼앗기고, 이후 항일 무장 투쟁에 투신한 것이다.

나석주는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며 군자금을 모으고, 경찰과 관리를 살해하자 경찰은 나석주라는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경찰은 사리원, 재령, 안악, 봉산, 장연, 대동, 구월산 일대에 무장 병력을 배치에 수사망을 좁혀왔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1921년 10월, 가족을 고향에 둔 채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6년 동안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나석주는 의열단의 무장 투쟁 대원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날려버릴 계획으로 귀국했다. 6년 동안의 중국 생활에서 중국어를 익혔기 때문에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귀국한 것이다.

제국주의에 희생 되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인을 쏘아 죽인 나석주의 의거는 ‘정의를 위한 거사’라는 의미처럼 한국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 농민 착취의 전위부대였고, 조선식산은행이 조선 경제 지배의 선봉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죄 없는 민간인 2명을 포함해 일본인 3명이 희생당하는 등 투쟁 방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만일 나석주가 던진 폭탄이 폭발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건물이 파괴되고, 그곳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더 많이 죽거나 다쳤다고 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이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은 시스템이지 건물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 간부였던 다바타 경부보는 조선인을 괴롭혔을 개연성이 충분하고, 설령 개인적 양심 때문에 조선인을 괴롭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식민 지배의 책임을 벗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죽어 마땅한 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나석주가 엉뚱한 곳에 폭탄을 던지고, 애매한 사람을 죽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석주가 공격한 대상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개인이 아니라 추상적인 제국주의의 심장부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바타, 마쓰모토, 기무라는 나석주가 쏜 총알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즉, 나석주 자신도, 나석주가 살해한 세 사람도 제국주의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테러리즘은 강자가 만든 법과 질서의 틀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주장을 관철할 수 없는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투쟁 방법이다. 정당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테러리즘이 정당화되기는 어렵다고 선량한 사람들조차 테러리즘으로 내모는 강자 중심의 질서가 정당한 것도 아니다.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테러리즘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할 수는 없다. 테러리즘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면 약자의 권익을 침해하는 강자 중심의 질서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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