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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930년대 최고의 부동산 투기 현장, 나진

2011-01-15

일본과 대륙을 잇는 최적의 항구, 나진
나진은 함경북도 동북쪽 귀퉁이에 있는 항구로 인근의 웅기와 함께 지금은 선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2년 나진이 갑자기 주목을 받은 것은 길회선 종단항으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길회선은 길림 회령간 철도이고, 종단항은 그 종착지에 있는 항구로 즉, 나진 항구에 길회선 철도의 종착지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길회선은 일본 경제에서 중요한 곳이다. 일본은 섬나라로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선 일본과 대륙 양측에 각각 대규모 항구가 필요하다. 이에 일본은 근대 이후 대륙과 교역하기 위해 세 가지 노선을 개척했다. 첫째는 쓰루가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어지는 '동해항로', 둘째는 시모노세키에서 부산, 신의주를 경유해 펑톈으로 연결하는 '조선철도', 셋째는 모지에서 다롄, 남만주철도로 이어지는 '황해항로'였다.

이렇게 세 가지 노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회선을 건설한 데는 각각의 노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거리만 보면 최적의 노선은 쓰루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동해항로였다. 그러나 동해항로는 블라디보스토크항이 겨울에 얼고, 러시아 영토라서 일본이 통제할 수 없다는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노선은 1910년 이후, 완전히 일본의 통제 아래 놓인 조선철도지만, 이동거리가 길고 철도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물류비가 비싸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대륙과 교역할 때 이동거리가 길고,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황해항로를 주로 이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길회선은 기존의 세 노선이 지닌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이었다. 쓰루가에서 소련의 지배 아래 놓인 위험천만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대신, 종단항과 길회선을 통하면 창춘, 옌지까지 더 안전하고 가깝게 닿을 수 있다. 또한 모지와 다롄을 연결하는 황해항로를 이용할 때보다 이동 거리가 30% 이상 줄어들어, 사흘 걸리던 여정도 이틀이면 주파가 가능하다.

이에 일본은 1909년 중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그때까지 조선 땅이던 간도와 길회선 부설권을 맞바꿨을 만큼 길회선을 간절히 원했다. 최적의 노선인 길회선이 완공되면 일본과 대륙 사이의 교역은 대부분 종단항 나진을 통해 이뤄질 것이 분명했다. 이론상으로 길회선 종단항은 남만주철도 종단항 다롄보다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 열풍의 현장
일본인 1909년에 이미 길회선 부설권을 확보했지만 부동산 투기 열풍이 30년대에 와서 활발한 것은 일본이 10여 년 동안 어느 항구를 종단항으로 삼을 것인지 결론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설권을 확보한지 16년이 지난 1925년에야 청진, 웅기, 나진 세 곳의 후보지를 겨우 발표할 만큼 종단항 건설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어느 항구로 결정하든 조금씩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진은 함경북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지만 청어와 정어리 잡이 고깃배들을 위한 어항으로 개발되어서 함경북도에서 나오는 목재를 반출하기에도 협소했다. 그런 청진이 만주와 중국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물자를 원활히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입지조건상 조선의 지방항구로는 손색이 없지만, 8천 톤급 대형 선박 수백 척이 한꺼번에 정박해야 하는 국제적 대항구가 되기는 역부족이었다.

웅기는 강제합방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항으로 개발된 항구였다. 항만시설이 청진에 비해 새것이라는 이점이 있었지만, 청진과 마찬가지로 항만이 협소하고, 물살이 세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게다가 청진에 비해 도시기반시설도 부족했다.

나진은 만주철도와 항만협회 기사들이 10여 년 동안 함경북도 해안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천혜의 항구였다. 하지만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1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길회선이 건설되는 동안 부동산 투기는 주로 청진에서 이루어졌고, 나진이 길회선 종단항으로 결정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32년 8월 중순. 함경북도 경성군에 갔다가 일주일쯤 뒤에 청진을 거쳐 웅기항에 이르렀다. 이때 웅기의 전 시가지는 “땅!”, “돈!” 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몇 해를 두고 청진이냐 웅기냐 나진이냐 하여 수수께끼처럼 이어져오던 길회선 종단항 문제가 필경 나진으로 결정되어 8월 23일 정식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토지 열풍이 휘몰아쳤다.
“자 이제 됐다!” 하고 와글와글 모여드는 것은 모두 다 브로커 무리다. 여관마다 대만원. 거리에는 밤낮없이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실로 공전의 대활기! 나진은 웅기에서 남쪽 30리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포구로 산이 좌우에 둘러 있고 인가가 적은 황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만 해도 한 평에 불과 2~ 3전이던 토지가 지금은 일약 10~20원까지 올랐다.
“아아 나진 근처에 땅마지기나 있었던들 두말할 것 없이 부자는 떼어놓은 것을!” 하며 탄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나진 토지를 수십만 평씩이나 가진 청진의 김기덕, 나남의 홍종화 같은 행운의 대지주들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네들이 그만한 토지를 장만할 적에는 그리 큰 힘이 든 것도 아니다. 만평이라 해야 100여 원가량이면 족했다. 또 그곳 빈농들이 지세 체납으로 말미암아 차압을 당하게 될 때 기십 전 되는 지세나 물고 거저 가질 수도 있었다. 이러던 땅이 오늘날 와서 천 배, 만 배나 오를 줄이야 꿈엔들 어찌 생각했으랴.
- 동광, 1932년 11월호 <나진만의 황금비>


길회선 종단항으로 나진이 결정되자 한국은 물론, 일본, 만주, 대만에서 투기꾼이 몰려들었다. 어떤 땅은 하루에 10여 차례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최고의 부동산 투기 현장이었던 나진의 투기 열풍 결과는 허무했다. 1932년 8월, 종단항 결정 이후 폭등에 폭등을 거듭하던 나진의 땅값은 같은 해 11월, 의외의 암초를 만났다. 만주철도가 종단항 결정 이전 가격으로 항만과 시가지 부지를 수용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수용 대상 부지 가격은 4달 동안 1,000배 가까이 올랐고, 땅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종단항 발표 이전 지주의 대부분은 이미 수십 배, 수백 배의 이익을 보고 토지를 매도했고, 큰손들도 대부분 이익을 실현해 빠져나간 상태였다.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나진 일대 웬만한 지역의 땅값은 서울 땅값보다 비쌌다. 천배, 만배씩 올랐던 땅값은 1/100, 1/1,000로 떨어지고 나서야 하락세를 멈췄다.

또한 축항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동해의 다롄', '조선의 경제수도'가 될 것이라던 종단항 나진의 장밋빛 청사진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인구 40만의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총독부와 만주철도의 예상과 달리 광복 직전까지 나진은 인구 4만의 소도시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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