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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①

2011-01-22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①
우리나라 최초, 여성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인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나기정의 2남 3녀 중 넷째, 딸 중에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1대째 수원에서 살았고, 수원 일대에 넓은 토지를 소유해 '나 부잣집, '나 참판댁'이라 불렸다. 그의 부친 나기정은 시흥군수, 용인군수를 역임한 개명 관료였다. 나기정은 첫딸 계석을 제외하고 딸, 아들 가리지 않고 모두 신교육을 시켰다. 다만 딸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나혜석은 아기, 막내딸 나지석은 간난이라 불렀다. 아무리 개명 관료라도 봉건적 인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혜석은 1906년,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하면서 '명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학교에 진학한 이후 돌림자를 넣어 '혜석'으로 개명했다. 나혜석은 진명여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급장 역할도 맡은 모범생이었다. 1913년 진명여고보 제3회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중등학교 졸업생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었다.

무엇보다도 나혜석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화가로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삼일여학교와 진명여학교에서도 미술 시간을 좋아했다.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일본 유학 이후이다. 당시 여성의 상급학교 진학에 가장 큰 걸림돌은 혼사였다. 진명여고보 졸업 당시, 나혜석의 나이는 18세로 혼기가 찬 것으로 인식되었다. 나혜석의 부모는 딸의 혼기를 노칠까 조바심쳤고, 혼사를 서두르려 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일본 유학 중이던 오빠 나경석의 권유와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나혜석은 어렵게 일본 유학을 떠난 만큼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우수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도쿄에 유학하는 조선 여학생 수효는 30명에 이르나 번화한 도회 문물에 접촉함과 부모의 감독을 가까이 받지 못하는 까닭으로 모두 성적이 좋다고 이르기 어려우나,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학업을 닦기 위하여 만리 해외에 괴로움을 달게 여김은 청년 남자가 도리어 부끄러이 여길 바이라. 그중에도 제일 학업 성적이 남보다 출중한 여자 유학생은 여자미술학교 생도 나혜석, 여의학교(女醫學校) 생도 허영숙, 일본여자대학교 부속 고등여학교 졸업생 김수창 등 세 규수이다.
- 매일신보, 1914.04.09

나혜석의 첫사랑
나혜석은 19세가 되던 해에 게이오기주쿠대학에 다니던 최승구와 사랑에 빠졌다. 최승구는 이광수, 현상윤 등과 도쿄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의 편집에 관여한 문학도였고,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절친한 친구였다. 나경석은 친구로서 최승구를 신뢰했지만, 동생의 남자친구로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최승구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나경석이 최승구를 반대한 것은 최승구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는 것이었다. 최승구 역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숙부의 강요로 충주 색시와 결혼했다. 결혼식 날 처음 만난 신부는 무식한데다 몸집도 크고 얼굴도 커서 최승구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최승구는 결혼식만 치르고 몇 해를 두고 신부 방에 들지도 않았다. 이에 최승구는 본처와 이혼하고 나혜석과 재혼하려 했다. 최승구가 나혜석과 결혼을 약속하고 숙부에게 본처와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숙부는 소실을 들이는 것은 괜찮으나 이혼은 안 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나혜석의 첫사랑은 최승구 집안에서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승구는 마음고생을 하다 지병인 결핵이 악화돼 학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귀국해 전라남도 고흥에 있는 형 집에서 요양했다. 이에 1916년 4월, 나혜석은 학기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흥까지 찾아와 문병했다. 최승구는 나혜석이 돌아간 다음날 세상을 떠나 고흥 오리정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도쿄에서 애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나혜석은 미친 듯 울었고, 신경쇠약에 걸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남편 김우영과의 만남
첫사랑 최승구를 잃고 반년 가까이 방황하던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에게 교토제국대학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 김우영을 소개받았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살이 많았고, 한 차례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3년 전 아내와 사별한 독신이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었고 나혜석이 첫사랑의 상처를 잊을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1918년, 두 사람은 나란히 졸업하고 귀국했다. 나혜석은 화가 겸 작가로 활동했고, 김우진은 인사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공부도 끝나고 연애기간도 햇수로 5년을 넘기자, 김우영은 결혼을 재촉했다.

나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세 가지를 요구했다.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혜석을 사랑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한다는 것이다. 다시 무리한 요구였지만 김우영은 무조건 승낙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20년 4월,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파격적인 결혼 조건만큼이나 두 사람의 신혼여행도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큼 파격적이었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나혜석의 첫사랑 최승구의 묘소가 있는 전라남도 고흥이었기 때문이다. 김우영은 아내의 첫사랑 묘소에 참배하고,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두 사람의 첨단 신혼여행은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훗날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결혼 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21년 3월에는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유화 개인전을 개최했고,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된 이후에는 해마다 작품을 출품해 그때마다 특선과 입선을 차지했다. 1922년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외교관으로 만주 안둥현 부영사로 임명된 후에는 만주로 이주해 외교관 부인으로 사는 호사를 누렸다. 김우영은 한결 같이 나혜석을 사랑했고, 나혜석의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결혼으로 사랑과 명예, 예술까지 모두 가진 그야말로 행복한 신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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