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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②

2011-01-29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②
나혜석과 김우영의 세계일주
1927년 김우영과 나혜석은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5년간 외교관 소임을 충실히 수행한데 대한 총독부의 포상이었다. 나혜석은 서양화를 공부한 화가였지만, 대가들의 실물 그림은커녕 칼라 도록조차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었다. 세계일주 여행은 서양 사람들의 생활상을 구경하고, 대가들의 그림을 실컷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부산에서 출발한 나혜석 부부는 경성, 신의주를 거쳐 펑톈에서 남만주철도로 갈아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로 모스코바를 거쳐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스위스에게 개최된 군축회의 총회를 참관하고,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를 관광했다. 유럽 여행 중이던 영친왕 이은 부부와도 만났고, 제네바 군축회의에 참가한 전 조선총독 사이토가 영친왕을 위해 주최한 만찬에 참가하는 호사도 누렸다. 나혜석은 여행지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러 이름만 들었던 대가들의 작품을 넋을 잃고 즐겼다.

두 달 동안 정신없이 유럽 일대를 여행한 나혜석 부부는 잠시 떨어져 각자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김우영은 베를린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부부가 각자의 전공 공부를 위해 별거한 기간은 넉 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넉 달이 정점으로 치닫던 나혜석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나혜석과 최린의 외도
김우영이 베를린으로 떠난 지 두 달째 되던 날, 화가 이종우의 집에서 파리 유학생들의 사교 모임이 열렸다. 그곳에서 나혜석은 메이지대학 법학과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린 민족지도자 최린을 만났다.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인 종법사였던 최린은 국제적 감각을 기르기 위해 나혜석 부부보다 1년 먼저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 21개국을 여행하고 파리에 머무르다 이종우가 주최한 사교 모임에 들렀다.

나혜석은 첫눈에 최린에게 호감을 가졌다. 이후 두 사람은 19세 차이를 뛰어넘어 우정과 사랑을 나눴다. 프랑스어를 몰랐던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 구경을 다녔다. 11월 20일 저녁, 두 사람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함께 나혜석의 숙소인 셀렉트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밤 최린은 자기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수십 회 이어졌고, 파리 유학생 사회에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나혜석과 김우영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넉 달 만에 다시 만난 나혜석 부부는 여행을 계속했다.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을 관광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 필라델피아, 나이아가라폭포, 시카고, 그랜드캐니언, 로스앤젤레스, 마리포사 대삼림 등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나혜석 부부는 하와이, 요코하마, 도쿄를 거쳐 1929년 3월, 21개월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한 후 김우영은 외교관 생활을 그만 두고 변호사 개업을 준비했다.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동안 2만여 원을 쓴데다 당장에 벌이가 없으니 갑자기 형편이 궁해졌다. 김우영은 개업 준비를 위해 서울에 머물고, 나혜석은 동래 시댁에서 지냈다. 결혼한 후 처음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데다가 시집살이를 시작하니 정신적으로 몹시 고통스러웠다.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데다 시집 식구들의 눈총이 따가워지자, 나혜석의 심신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편지를 써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김우영 귀에는 나혜석이 최린에게 연애편지를 부쳤다는 소문이 들어갔다. 이에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간통죄로 고발하겠다고 으르고, 나혜석은 하는 수 없이 이혼장에 도장을 찍었다. 김우영은 이혼장에 도장밥이 채 마르기도 전, 서울에서 동거하던 신정숙과 혼인신고를 했다. 나혜석의 외도로 이혼을 했지만 김우영 또한 외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운의 신여성, 나혜석
남녀가 함께 외도를 했지만 당시에는 여성에게만 비난의 화살이 향했다. 사회적 파문이 일어난 이후에도 최린과 김우영의 사회적 위상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최린은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 사장,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등으로 친일에 앞장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우영은 도청사무관, 중추원 참의 등으로 영전을 거듭했다. 부정한 여자라는 낙인만 더 깊게 찍힌 나혜석만 재기불능의 상태로 내몰렸다. 1937년 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혜석은 부산 동래로 달려갔지만, 김우영의 저지로 상청에서 끌려나는 수모를 당했다.

나혜석은 심한 충격을 받고 김일엽이 출가한 수덕사 견성암으로 찾아갔다. 김일엽은 나혜석에게 불교에 귀의할 것을 권고했지만, 나혜석은 유명한 중이 두 사람이나 되는 것은 싫다며 사양했다. 이후 나혜석은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장기 체류하면서 불교에 귀의해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나혜석은 이따금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기도 했지만, 김우영은 경찰까지 동원해 나혜석의 접근을 막았다.

나혜석은 40대에 이미 60대 노인으로 보일 정도로 심신이 쇠약했고, 언제부터인지 서울 원효로 시립자제원이란 복지시설에 의탁해서 지냈다. 그리고 53세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초라한 행색의 시신이 한때 조선 화단을 대표하던 여류화가였음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혜석의 죽음은 <관보>에 무연고자 시신을 찾아가라는 광고가 실린 후에야 알려졌다. 나혜석이 세상을 떠나던 해, 김우영과 최린, 이광수는 나란히 반민특위 법정에 섰지만 흐지부지 석방되었다.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들의 운명은 너무 달랐다. 나혜석은 여자였고, 최린과 김우영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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