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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양력설과 음력설을 두 번 쇠다! 이중과세

2011-02-05

1년에 두 번의 설을 쇠다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는 첫 번째 명절은 설날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양력과 음력의 혼돈으로 인해 민족의 풍습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설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구정이라 불렀고 공휴일도 아니었다. 설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85년으로 그나마 하루밖에 쉬지 않았다. 1월 1일을 설날이라고 불러 설날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일제 때 붙인 구정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없어서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음력 1월 1일이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1989년으로 겨우 22년밖에 지나지 않은 셈이다.

농사를 나라의 근본으로 여겨온 우리나라는 월력을 중심으로 절기를 지냈기 때문에, 음력 1월 1일인 설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민족의 명절 음력 1월 1일이 명절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것은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때부터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음력을 폐지하고 모든 명절을 양력으로 바꾸면서 양력설을 쇠라고 요구했다.

일본의 음력설 억제 정책
일본은 새해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고, 그날이 설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중으로 설을 쇠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고, 구태라고 홍보했다.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강압적으로 음력설을 억압했다. 중국인은 음력 정월 초하루가 설일 뿐 양력 1월 1일은 명절로서 의미가 없고, 일본은 음력 정월 초하루는 아무 날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원래 하던 대로 음력 정월 초하루에 설날을 보내고 싶어도 일본이 양력설을 쇠라고 억압해 어쩔 수 없이 설날을 두 번 보내게 된 것이다.
1929년은 벌써 정월도 다 지나가고 2월에 접어들어 벌써 아흐렛날까지 이미 지나가지만, 음력 무진년은 어제로써 마지막 영겁의 저 공간으로 흘러가 버리고 음력 기사년 초하루날을 오늘부터 헤이게 된다. 이중과세를 말자, 양력설을 지키게 하자 하는 소리가 이미 낡아 빠졌을 만치 되어 버렸다. 근하신년의 연하장도 양력설에 띄웠다 마는 아직도 떡국은 오늘 아침에야 먹고 세배도 오늘 아침에야 허리를 굽힌다. 새로운 사람들이 근하신년을 몇 천 몇 만 장을 띄우되, 빚쟁이가 나머지 빚을 갚으라고 성화같이 재촉함도 음력 그믐날에 더욱 심하다. 남대문과 배오개장에 설빔, 반찬거리가 산같이 쌓이고, 종로 큰 거리에 끈목장수의 허리띠, 대님, 당깃감이 오색찬란하게 바람에 나부끼며 포목점 진열대에는 주단 능라가 휘황하게 행인의 안목을 유인하고 있다. 모두가 설 기분이다.
“돈 없어 죽겠군! 빚쟁이 때문에 살 수가 있나. 북어 한 쾌도 못 사겠군.” 이 같은 비명이 방방곡곡에서 일어난다. 바람이 차게 분다. 거지가 은행 앞에서 울고 있다. 이것이 이중과세를 하는 조선인 시가의 정경이다.
- 1929년 2월 10일, 동아일보 <이중과세의 고통>

1989년 설날이 복원되기 전까지 양력설을 쇠는 집도 적지 않았다. 특히 공무원은 음력설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력설을 쇠어야 했다. 하지만 자영업자나 농민 등 근무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계층은 굳이 양력설을 쇨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당시 한국인의 80%는 농민이었기 때문에 휴일이 아니어도 음력설에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중과세의 문제점
일본이 양력설을 쇠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한국인들은 양력설에 대한 반감이 컸다. 하지만 해방 후 음력설이 바로 복원되지는 않았다. 이는 음력설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의 강요와 상관없이 이중과세의 폐해를 지적하는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따져보니 설 지낸지가 3주일밖에 안 된다. 꼭 3주일하고 나흘재이다. 설날 입었던 옷을 아직 그대로 입고 있고 설날에 샀던 비웃 한 두룸이 아직 서너마리 남어있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연하장 대금을 아직껏 셈해주지 못하였고, 과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세배갔다오다가 넘어져 다친 볼깃짝이 아직껏 흠집이 있다. 그것은 고사하고 신년호 내노라고 밤새운 피로가 아직 눈섶에 달려 있고, 신년회 때에 침독되었던 알콜 냄새가 아직 콧구멍 속에 남아 있다. 이렇게도 과세한 증거는 분명하다. 이것은 꿈이 아니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어린이 또는 아내를 비롯하여 기름장수 여편네까지 다시 설을 쇤다고 동의와 재론을 거듭하면서 당기를 사야 되느니 옷감을 바꿔야 하느니 조르기까지 하니 이것이 대체 웬일인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과세는 분명히 하였는데 한 달 만에 또 과세를 한다하니 세월이 급진병에 걸렸는지 인간이 환몽에 빠졌는지? 실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집만 이와같은 환몽인가? 하고 이웃을 둘러보니 이웃도 매한가지이다. 앞집, 뒷집, 큰집, 작은집 할것없이 북부 일대는 다 그러하고 조선인촌은 대개가 그러하다. 따져보니 전 조선 방방곡곡 가가호호가 모두 그런 것 같다. 그리하여 어린이 늙은이 아낙네 서방님네 할 것 없이 설날을 손꼽아가며 설빔준비에 몰두하는 모양이다.
지금의 조선에는 전 민족적으로 환락하는 대(大)명절이 없다. 1월1일에는 양력 명일이니 일본 명일이니 하야 대다수의 구습 남녀는 서푼의 가치도 없이 넘겨 보내고 정월 1일은 음력 명절이니 구습 명절이니 하여 소수나마 신식남녀는 의부아비 제삿날만큼도 아니 여기니 결국 -조선은 설이 없다.
양음 이중과세! 모르는 자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하면 실로 과한 고통이다. 전 민족으로 과한 손해이다. 실질의 손해와 고통은 차치하고 정신상 손해와 고통이 여간 아니다. 양도 아니요. 음도 아니요 양도 후지부지 음도 후지부지 일 년 365일 중에 하루도 전 민족으로 춤추고 노래할 날이 없으니 이런 비애도 또 있으랴?
- 1930년 2월호, 별건곤 <이중과세 폐지책 6편, 설 많은 조선, 설 없는 조선>

그나마 1989년 이후 음력설이 회복되어서 다행이지만 음력설이 현대 한국인의 시간 감각에 잘 맞지 않는다는 문제는 여전히 안고 있다. 하지만 문화나 풍습은 정부에서 제도를 만들어서 억지로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변화돼 나가는 것이다. 생활방식과 음식, 문화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명절의 풍속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대로 둬야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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