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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두왕(米豆王) 반복창 1

2011-02-12

백만장자의 화려한 결혼식과 초라한 최후
1921년 5월, ‘미두왕’ 반복창과 ‘원동(원서동) 큰 재킷’ 김후동의 결혼식이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요시마쓰 인천부윤을 필두로 인천의 관계와 재계 유력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인천에서 장곡천정 조선호텔까지 하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열차의 객차 하나를 통째로 빌렸고, 경성역에서 호텔까지 이동을 위해 자동차 수십 대를 동원했다. 당시 서울 시내 자동차는 다 합쳐도 200여대에 지나지 않았으니 서울 시내 자동차의 1/3이 반복창의 결혼식에 동원된 셈이었다. 결혼식 당일 비용만 3만 원(현재가치 30억 원)에 달했다니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조선을 대표하는 호화 결혼식으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 김팔연 : “서울서 결혼식을 호화롭게 한 이가 누구일까?”
- 복혜숙 : “반복창일 걸. 본명보다 반지로라는 일본 이름이 더 유명하지요. 미두를 해서 30만 원인가 하는 거금을 벌었는데 부자가 되고 나서 처음 한 일이 큰집 짓고 좋은 색시 얻어서 장가든 것이었어요. 인천 해안에다가 아방궁 같은 큰집을 짓고 신부를 골랐는데 인천이 좁다고 서울에 올라와서 여학교를 죄다 뒤졌거든. 그중에서 경성여자고보에 다니는 김후동이란 처녀를 골랐다는구만. 김후동이가 누군가 하니 저 유명한 ‘원동 재킷’의 언니였지요. 나도 보았는데 얼굴이 그냥 꽃이에요. 참말 미인이거든.”
- 이서구 : “그렇지. 나도 보았는데 선녀 같았어요. 그 여자가 조선서 처음으로 치마 끄트머리에 수를 놓아 입었지. 그 여자가 시작이었어. 김후동은 바이올린도 잘했지. 반복창의 결혼식은 인천서 신사 다수를 초청해 조선호텔에서 거행했는데 인천부윤이 축사도 하고 떠들썩했었지.
- 1939년 1월호, 삼천리 <장안 재자가인, 영화와 흥망기>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린 반복창은 그로부터 18년 후인 1939년 10월, 인천 송림동 나무집 곁방에서 불혹의 나이에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반복창이 죽은 날은 마침 인천 미두시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어서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미두로 흥망성세를 맛보다.
미두는 반복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미두에 성공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다가 미두에 실패해 재산과 가족은 물론 정신까지 빼앗기는 기구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사십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 인천 경제력의 30%나 차지하던 조선취인소 인천미두부는 청산시장으로서 앞으로 십여 일만 지나면 조종을 울리게 된다. 인천에 미두시장이 생긴 이래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미두왕으로 한때 그 이름을 떨친 반지로도 사십 평생을 미두시장과 떨어지지 못하더니 미두시장의 조종과 함께 지난 18일 오전 8시 세상을 떠났다.
반지로는 오십만 원이란 거대한 돈을 미두시장의 방망이 소리 한 번에 주머니에 넣었다가 또 한 번의 방망이 소리에 오십만 원은 간 곳이 없어지자 정신병에 걸려 이십년 동안이나 신음을 하면서도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고 며칠 전까지도 미두시장을 기웃거렸다. 반지로가 미두시장과 같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와 미두시장과의 인연은 죽음까지도 함께하게 된 셈이다.
- 1939년 10월 23일, 조선일보

미두 시장은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청산거래 형식으로 사고팔던 곳이다. 처음에는 쌀 외에도 콩, 면화, 명태 등이 거래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쌀 한 품목만 남았다. 기간을 두고 쌀을 거래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기미시장’이라고도 불렀다. 원래는 미곡의 품질과 가격을 표준화하기 위해 설립된 시장이었지만, 실제로는 공인된 도박장처럼 운영되었다.

미두라는 말도 쌀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쌀을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거래하는 것이다. 미두의 최소 거래 단위는 100석이었다. 쌀을 사거나 팔려면 중매점에서 미두통장을 개설해 10%의 증거금을 예치해야 했기 때문에 미두를 하려면 최소한 몇 백 원은 있어야 했다. 당시 평범한 월급쟁이 한 달 치 봉급이 50원 남짓이었다. 더러는 쌀과 현금을 주고받으며 청산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전체 거래량의 0.5%에도 못 미쳤고, 나머지 99.5%는 차액만큼 현금을 주고받는 것으로 청산이 이뤄졌다.

실제로 기간을 두고 쌀을 사고파는 미두시장에는 쌀이 없었다. 결제일이 되기 전이라도 쌀값이 등락해 증거금이 10%에 못 미치면 부족한 만큼 채워 넣어야 했다. 만일 채워 넣지 못하면 다음날 반대매매로 청산되었다. 가령 쌀 100석을 300원의 증거금으로 석당 30원씩에 샀다면 쌀값이 3원만 오르내려도 두 배를 벌거나 깡통을 차게 되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 거래였다.

미두왕, 반복창
반복창은 인천에 미두시장이 개설된 지 4년 후인 1900년, 강화도 이방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지방관아의 실무책임자였던 만큼 어린 시절 반복창은 풍족한 환경에서 지냈다. 그러나 1910년 강제합방 이후 부친이 직장을 잃자 반복창의 가정은 급속히 기울었다. 호구지책으로 부친은 장사를 시작했지만 손대는 족족 큰 손해를 보았다. 거듭되는 사업실패로 화병까지 얻은 부친은 반복창이 열두 살 되던 해에 빚만 잔뜩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잃은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12세 소년 반복창은 생활전선으로 내몰렸다. 강화도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가 아라키라는 일본인 집에 아이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갔다.

개항 직후 화륜선을 몰고 인천으로 건너온 아라키는 한강 수로를 따라 인천과 한양을 오가면서 곡물을 운송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1896년, 인천에 미두취인소가 들어서자 ‘아라키중매점’이라는 미두중매점을 차렸다. 오늘날로 치면 ‘취인소’는 선물거래소, ‘중매점’은 선물회사에 해당한다. 반복창은 아라키의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그 자신도 자랐다. 그렇게 2년을 지낸 후 반복창은 아라키중매점의 요비코(미두 시세를 전하는 아이)로 들어갔다. 14세 소년 요비코 반복창의 주 임무는 중매점에 모여 앉은 미두꾼에게 인천과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소리를 질러 전달하는 것이었다.

미두 시세는 그해 농사의 풍흉, 날씨, 거래량, 정치·경제적 변인 등에 두루 영향을 받았지만, 오사카도지마취인소의 미두 시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산 쌀의 가장 큰 소비지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과 오사카 사이에는 전화선이 깔리지 않아 모든 연락은 전보를 통해 이뤄졌다. 미두거래는 오전에 열리는 전장에서 10회, 오후에 열리는 후장에서 7회, 하루에 총 17번 이뤄졌는데, 쌀값이 오르다가도 오사카 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졌다는 전보가 날아오면 다음 거래에서는 상승세가 꺾이기 일쑤였다.

미두꾼에게 시세를 외치고 다니면서 반복창은 언젠가 자신도 미두로 일확천금을 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철들면서 보고들은 게 미두뿐이다 보니 반복창에겐 미두가 세상의 전부였다. 아라키는 먹는 것 자는 것 제하고 반복창에게 월급조로 한 달에 6원씩 주었다. 터무니없는 박봉이었지만 미두 밑천이라 생각한 반복창은 허투루 쓰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

하지만 밑천만 있다고 미두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복창은 일과가 끝나면 그래프를 그려가며 밤을 새워 그날그날의 시세를 연구했다. 보통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그였지만 독학으로 일본어를 깨쳤고 경제학사 뺨칠 만큼 해박한 경제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1918년, 아라키는 19세 반복창을 바다지(중매점의 시장대리인)로 발탁하고, 축하의 의미로 지로라는 일본식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반복창은 아이를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간 지 6년 만에 아라키중매점의 제2인자 반지로로 미두시장에 데뷔했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라키중매점이 파산하면서 20세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수중에 가진 것이라곤 8년 동안 요비코, 바다지 생활을 하면서 모은 500여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듬해 반복창은 30만원(현재 300억 원)의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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