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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두왕(米豆王) 반복창 2

2011-02-19

미두계의 패왕, 반복창
반복창은 8년 동안 일했던 아라키중매점이 문을 닫자 앞길이 막막했다. 수중에는 500원이 있었는데, 반복창은 이 돈으로 미두꾼으로 나섰다. 반복창은 500원으로 6개월 만에 30만원(현재 300억 원)을 벌었다. 미두꾼으로 나선 처음에는 큰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었지만 1920년 1월, 몇 달 동안 지루한 보합세를 이어가던 쌀값이 갑자기 치솟기 시작했다. 큰 규모의 중매점은 하루 수수료가 만원을 넘길 정도로 거래량이 폭증했다. 반복창은 한 섬에 55원씩 1만 섬을 사서 73원씩에 팔아 한 번 거래로 18만 원을 버는 등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반복창의 재산은 30만원으로 불어났다. 한 달 월급이 5~6원에 불과하던 요비코가 미두로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천지가 온통 반복창 이야기로 들끓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의 신의 조화라. 반지로는 이상하게도 팔아도 먹고 사도 먹고 거짓말같이 시세를 잘 맞췄다.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그가 출입하는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과 조선은행 인천지점에는 각각 20만원씩 거금이 예금되었다. 그를 따르는 부하가 매일 30~40명에 달해 그를 미두신(米豆神)으로 추대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 강화도에 가 산도 사고 전답도 사며 인천 부도정에 있는 일본인 창기도 조건 없이 여덟 명이나 속신(贖身)시켜 주었다.
- 1930년 2월 15일, 매일신보

21세 청년 반복창은 미두꾼으로 나선 지 1년 만에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미두계의 패왕으로 이름을 떨쳤다. 반복창이 중매점에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려도 미두 시세가 몇 원씩 오르내렸고, 그가 한번 팔고 사면 오사카 미두시장 시세까지 출렁거렸다.

미두왕과 미의 여신 김후동의 결혼
김후동과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것도 이 시기다. 일확천금에 득의양양해진 반복창은 인천 외리에 400평 집터를 사고 20만 원을 들여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저택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굽어보면 인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올려다보면 만국공원이 펼쳐지는 인천 최고의 집터였다. 땅을 사고, 도면과 지반 다지는 데만 9만 원을 들였다. 어른 키 두 배는 됨직한 높고 튼실한 돌담이 완공되어 갈 때쯤, 반복창은 저택의 안주인을 찾아 나섰다. 미두신으로 추앙받던 반복창이 배우자로 간택한 여성은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김후동이었다.

김후동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인이었다. 반복창과는 동갑이었지만 환경은 너무 달랐다. 돈과 미모라는 확실한 경쟁력이 없다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부였다. 김후동은 경성여고보에 다닐 때 바이올린 연주를 잘해 음악회 독주를 도맡아했고, 얼굴이 꽃같이 아름다운 데다가 치마 끝자락에 수를 놓아 입고 다녀 뭇 남성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여고보까지 졸업한 미모의 신여성이 보통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미두중매점 요비코 출신 졸부와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화결혼식이 알려지자, 두 사람을 축복하기보다는 두 사람이 과연 잘 살 것인지 두고 보자는 사람이 많았었다.

미두왕의 몰락
반복창의 몰락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1922년, 22세 되던 해부터 망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시세예측에 실패한 적이 없던 반복창이 실패를 경험했고, 어찌된 일인지 신중에 신중을 기했음에도 반복창의 예측은 자꾸만 빗나갔다. 1921년 한 해 동안에만 10만 원 상당의 손실을 입었다.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아 집 공사도 잠시 중단시켰다. 인천 외리에 짓고 있던 저택의 규모도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인천 외리에 짓던 반지로의 집은 실패를 볼 때마다 설계를 줄이고 줄이다가 나중에는 소위 만리장성 같다는 굉장한 돌담과 사백 평의 커다란 집터에 지어진 집은 네 칸짜리 움막이 되어버렸다.
- 1939년 5월 14일, 조선일보

1923년 생계마저 어려워지자 반복창은 아라키가 그랬던 것처럼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한창 때 그를 미두신으로 추앙하며 따르던 부하가 30~40명에 달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이후에는 정우석, 박용하 둘만 남았다. 신이 그처럼 처참하게 무너졌는데 사제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세 사람이 남은 돈을 다 합쳐도 최소 거래 단위인 100석을 살 수 있는 밑천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반복창은 밑천이 없어 미두시장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이후에도 미두시장 근처를 기웃거리며 합백꾼들과 어울렸다. 절치기라고도 부르는 합백은 많으면 1~2원, 적게는 10~20전씩 걸고 쌀값이 오르는지 내리는지를 맞히는 사설 미두였다. 한때 미두왕으로 군림했던 반복창은 한동안 합백 대장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한번 거래로 18만 원을 벌던 반복창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영락이었다.

김후동은 신혼의 단꿈이 채 깨지기도 전에 반복창은 무일푼으로 전락했다. 김후동은 자신이 반복창의 백만금 재산에 눈이 멀어 결혼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무일푼으로 전락한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낳아주고, 결혼 생활 재미가 어떠냐는 질문에는 애써 행복한 척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벌써 김후동 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요, 며칠 안 돼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들으니 그의 남편 반복창 씨가 미두에 크게 실패하여 부부끼리 여러 가지 근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란 세상에 돌고 도는 것이니 잃은들 얻은들 무엇이 그리 신통하리오. 오직 신통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맺힌 세 개의 사랑의 열매인가 하노라.
“어머니 된 감상 말이에요?”하고 그는 그 애교 있는 얼굴에 웃음을 듬뿍 띠면서
“아이 낳기 전에는 남편이 제일인 것 같더니 아이 낳은 후부터는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처녀 시절에는 자식이 무엇이 그리 중할까 그랬더니 막상 낳고 보니깐 그렇지 않아요.” 하고 사랑스러운 아들딸을 양쪽에 앉히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앉았다. 그의 얼굴 가운데는 어머니로서의 만족한 빛이 가득했다.
- 1926년 1월 22일, 동아일보

하지만 김후동은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바로 그 이듬해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모두 맡기고 이혼했다. 반복창은 미두로 돈도 잃고, 청춘도 잃고, 아내까지 잃고 나서도 미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거듭된 실패와 상실감으로 30세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정신마저 이상해졌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조차 힘든 불구자가 되었지만 매일같이 미두시장 근처를에서 “쌀값이 오른다.”, “쌀값이 떨어진다.”라고 중얼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1939년, 일본은 쌀을 전수물자로 분류하고 쌀과 쌀값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쌀의 공정시세를 결정하는 미두시장의 기능이 유지되기 어려워진 것이었다. 반복창은 1938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났고, 미두시장은 그로부터 20일 후인 11월 7일 사라졌다. 미두왕 반복창은 미두시장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를 맛본 진정한 미두왕이었지만 부를 누린 시간은 고작 2년에 불과했다. 미두왕 반복창의 부와 몰락은 돈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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