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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930년대 보통사람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 1. 가정 문제

2011-02-26

1930년대 보통사람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 1. 가정 문제
신문에는 주로 사회적인 현상이나 특이한 사건, 범죄 등 보통 사람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가 실린다. 하지만 1930년대 신문들은 저마다 독자 고민 상담 코너를 운영했다. 조선일보에서는 ‘어찌하리까’라는 제목의 독자 상담코너를 운영하며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 진로 문제 등에 대해 상담해줬다. 1930년대 보통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했을까? 첫 번째는 가정 문제이다.

가정문제 1. 이혼문제
- 조선일보, 1935년 5월 28일 <소설적 연애만 찾고 있는 아내와 헤어져야 할까요?>
저는 약 일 년 전에 내 친구의 누이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굳게 백년해로 할 것을 맹세하고 남부럽지 않게 신혼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 년 후 아내가 무슨 권태를 느꼈는지 남편 된 내가 모르는 동안에 남의 아내로서 차마 못할 부정사건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당장에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아내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를 하고 또 친구요 처남인 그 사람과 처가 체면을 생각해서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본래부터 성격이 이상해서 그 후에도 여러 가지로 고통을 줍니다. 즉 소설적 연애에 영화적 연애를 공상하고 일이 없으면 산보나 하고 밤이면 영화 구경이나 가고 이럽니다. 그러니 우리 조선여자로서는 너무도 엄청난 짓이 아닙니까. 어째든 성질이 본래 타고나기를 지독한 허영녀이기 때문에 좀체 고쳐내기가 어렵습니다. 이제는 나도 기진하여 밉고 괘씸한 생각뿐이어서 제 친가로 돌려보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려보내려고 생각하니 뭣인가 있지 못할 슬픈 심정을 금할 수 없군요. 아 아내의 나이가 어리니 자식이나 생기면 좀 나을는지요. 그래도 앞으로 믿고 살기 어려운 사람이니 딱합니다. 이 여자는 보통학교 정도의 지식을 가젓고 마음이 너무 좋아 항상 감독과 구속이 없으면 진창에라도 들어갈 위인이고 정조관념이 없습니다. (평양 일독자)

이 고민에 대해서는 ‘소설가 이태준’이 상담했다.
<소설가 이태준의 상담내용>
아내 되는 분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진심으로 사랑하고 착한 맘으로 처리하면 훗날 그다지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인 되시는 이 주위에 나뿐 친구를 절대 금지 하십시오. 아직 나이 어린 분은 유혹되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되도록 가정에 마음을 두고 좋은 취미를 갖도록 하는 게 좋은데 가끔 독서도 하고 화초를 가꾸고 새도 기르고 수예 같은 것도 하고 이렇게 여러 가지 일에 마음을 쓰도록 이끄십시오. 영화구경을 딱 못 가게 막아놓으면 도리어 마음이 고약하게 엇나가는 수도 있으니 구경은 가되 잘 조절해서 좋은 사진을 보도록 할 것입니다. 아무것이나 많이 가서 보는 것보다는 좋은 것을 택해서 보면 오히려 좋은 교양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신네 가정에 어서 아기가 나서 부인께서 어머니가 되면 한결 모든 달뜨는 맘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 사연은 ‘어찌하리까’ 코너에 실린 가정 문제 고민 중에는 그나마 점잖은 사연이다. 남편의 중혼으로 희생된 여성 등 대부분 이보다 더한 사연이 많았다.

가정문제 2. 중혼문제
- 조선일보, 1933년 9월 20일 기사
저는 금년 십구 세이고 이름은 정자입니다. 작년 4월에 우연히 모 전문학교 이학년 학생과 서로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습니다. 만일을 두려워하여 민적등본까지 교환해서 보았습니다. 그는 확실히 미혼자였습니다. 저는 조금도 불안하다는 생각 없이 상대를 사랑하였습니다. 그 후 9월에 그와 같이 고향에 가보니 뜻밖에 본처와 일곱 살 먹은 여자아이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 된 사람은 그 제야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본처는 구여성일뿐더러 뜻이 맞지 않아 몇 해 안에 이혼해 보낼 것이니 고생이 되고 타인들의 조소를 받더라도 참아 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했습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고, 몇 해 안에는 해결이 되겠지 하고 울분과 고통을 참아 넘기며 그럭저럭 오늘날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 달에 뜻밖에 본처에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울어도 시원치 않았고 죽어도 시원치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맘에 없다는 아내에게서 자식까지 낳았으면서도 참아 달랍니다. 저는 그런 꼴을 보기 싫어 만사를 단념하고 상경하였더니 남편 된 사람이 쫓아 올라와서 한 3년만 있으면 해결될 테니 그 동안은 동경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저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고 헤매는 여성입니다. 한 해 두 해 지나가도 해결이 안 되고, 본처가 자식을 자꾸 낳으면 저의 신세는 어찌될까요? (울고 있는 여성)

유부남인지 모르고 속아서 한 결혼이라고 해도 상대방 여성은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일이 워낙 흔했기 때문에 무턱대고 남성을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 이 사연에 대한 답변은 ‘R’이라는 기자가 했다.
여자를 사랑하면서 본처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남자의 의지가 박약한 것으로 보이지만, 세상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데 있으니까 지난 과거를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남자의 말대로 동경에서 유학하면서 공부에 힘쓰고, 3년간은 남자와의 머리 아픈 문제를 잊어보세요. 그리고 약속한 3년 후에 그 남자의 행동을 보아가면서 일을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가정문제 3. 가정폭력
당시의 가정은 남성중심주의가 지배하던 시기로 남편의 지나친 폭력과 학대에 괴로워하는 여성의 고민 상담도 많았다.
- 조선일보, 1931년 10월 9일 <병들어도 학대만 해요>
원대한 포부와 이상을 가지고 영화로운 졸업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어떠한 기회로 이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수차 연애편지를 보냈으나 천진한 나는 그 회답을 쓰기가 어려워 주저했습니다. 그를 잘 아는 동무에게 물어본 후 신임할 점이 있어 보통 인사의 답을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수차 편지를 하나, 나는 신통한 반응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 힘줄을 끊어 혈서로서 진실하다는 표시를 하면서 나에게 결혼을 신청 하였습니다. 결국 부모의 양해를 얻어 그의 신분을 조사한 후 약혼 승낙을 얻었습니다.

거침없이 세월이 흘러 저는 졸업하고 교편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심리는 황급하게 결혼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편을 잡은 지 몇 달이 안 돼서 그해 가을 화촉을 밝히고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요구로 소위 시가에 들어가니 구도덕에 봉건적 인습으로 봉쇄한 인정과 풍습이 다른 나라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믿고 있던 남편 하나 바라고 살았지요. 그런데 그 후 남편은 화류계에 몸을 던져 질탕하게 놀기에 그러지 말기를 충고하였더니 되지못하게 계집이 남편 하는 일에 간섭하냐고 폭언을 퍼붓고 폭행을 행사합니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무서운 병마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신경쇠약과 영양부족으로 인한 빈혈증, 남편으로부터 전염된 무서운 성병에도 걸리게 되었습니다. 1개월이나 신음하다가 겨우 도회지 병원에 입원하여 10여일을 지나서 목숨만은 구하였습니다. 그는 성화같이 퇴원하기를 재촉하여 일장 비극에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갖은 고초를 받아가면서 완치도 못한 몸으로 1개월 만에 퇴원하였습니다. 그는 강제로 저를 퇴원시키고 병석에 둔 채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돈은 마음대로 쓰면서도 치료비는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한 그의 몰인정에 분한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나무랐더니 그는 병석에 있는 이 몸을 갖은 폭언과 폭행을 다하고도 부족하여 인연을 끊고 헤어졌습니다. 나도 진정으로 살기 싫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날까 하나 부모의 사정이 애처롭고, 살자하나 난잡한 이 사회가 염증이 나서 어찌하면 좋을까요? 죄악의 씨까지 있으니 어미의 마음이 진정치 못하겠나이다. 병상에서 신음하는 것을 위하여 정당한 처치를 지도하야 주시옵소서. (시내 급급생)

이 고민을 상담한 ‘H’ 기자는 위자료를 받고 헤어져 여성 운동에 투신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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