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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에 초청된 최초의 서양인, 묄렌도르프 ①

2011-03-19

한국에 초청된 최초의 서양인
현재는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도 많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도 많지만, 10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외국인을 본다거나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또한 평생 외국에 나가보지 못한 한국인과, 평생 외국인을 본 적이 없는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1882년까지만 해도 개항장의 일본인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한국에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서양인은 한국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덕국인 목인덕인 묄렌도르프는 1882년,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한국에 최초로 초청된 서양인이었다.

덕국인 목인덕씨가 계미년경에 도한하야 제물포 부산 원산 세 항구를 열고 총세무사가 되고 외무아문 협판을 겸임하여 세관을 개설하고 외무에 기여한 바도 많았으며 갑신 우정국 사변에 민영익씨를 구출한지라 그 후 수년에 아국 조정에 해고되고 청국에 거주하여 학당 교습과 해관세무가를 역임하였더니 근일 청국 영파항 세무사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려 노력하다가 본년 4월 19일에 심장병으로 사망하였으니 향년이 53세더라.
- 황성신문, 1901년 5월 13일 <조 목인덕씨>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질 만큼 서양에 대한 배척과 쇄국 열기가 뜨거웠다. 하지만 1882년 청국의 권고에 따라 미국, 영국, 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국교를 맺으면서 외교 전문가가 필요하게 됐다. 이에 조선은 참판 벼슬까지 줘가며 서양인을 국왕의 외교 고문으로 초청했다.

특히 중요한 문제는 관세 문제였다. 1876년 개항 이후, 부산, 원산, 인천 세 곳의 개항장에는 일본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6년이 지나도록 조선은 세관을 설치하지 못해 관세를 징수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국내 산업이 열악한 상태에서 무관세로 들어온 일본 상품이 국내 시장을 휩쓸게 되자 해관 설치가 시급했던 것이다. 이에 조선은 관세 전문가인 서양인을 초청할 수밖에 없었고, 세관 설치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조선에 초빙된 인물이 바로 35세의 독일인 묄렌도르프였다.

묄렌도르프! 그는 누구인가?
묄렌도르프는 1847년 독일 북부 체데닉에서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묄렌도르프는 1865년 할레(Halle)대학에 입학해 법학과 언어학, 동양학을 공부하고,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묄렌도르프는 8개 언어를 구사하고, 히브리어는 방언까지 이해할 정도로 언어 구사 능력이 탁월했다. 보병 연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공무원 임용을 기다리던 묄렌도르프에게 1869년 연방정부 인사 담당자로 일하던 친구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청국 해관에서 독일인 직원을 구하는데 지원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친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청국 해관 직원으로 처음 아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4,000여 명의 유럽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묄렌도르프의 첫 번째 직장인 상하이 해관만 해도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노르웨이인 등 17명의 유럽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언어였다. 8개 언어에 능통한 묄렌도르프였지만 유독 중국어에는 약했다. 묄렌도르프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해관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과외선생을 구해 부지런히 중국어를 익혔다. 중국어를 배운 지 불과 몇 해 만에 자유롭게 필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한문 실력이 늘었고, 어지간한 방언도 알아듣게 되었다. 3년 안에 통과해야 할 중국어 시험도 2년 만에 통과할 정도로 어학 실력이 탁월했고, 해관 업무도 능통했다. 하지만 이후 변방 해관의 말단직을 떠돌다가 5년 만에 그만 뒀다.

청국 해관을 그만 둔 묄렌도르프는 독일 공사관 통역으로 일했다. 묄렌도르프의 원래 꿈이 외교관이었던 만큼 공사관 통역을 하다 보면 외교관으로 임명될 기회도 생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묄렌도르프는 독일의 외교관 임용 관행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외교관에 임명될 수 없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아니면 정식 외교관으로 임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에게도 기회는 왔다. 톈진 주재 독일 영사관 대리영사로 근무하는 동안 톈진 북양아문의 책임자 리흥장과 인연을 맺게 됐다. 리흥장은 청국의 서양관련 사무를 총괄하던 외교 총책임자로 독일 대리영사인 묄렌도르프가 친분을 맺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들의 만남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영사가 부임인사를 가면, 리홍장이 답례로 영사관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였다다. 하지만 리홍장은 자신이 관할하던 청국 해관의 하급 직원이었던 묄렌도르프에게는 답례 방문을 하지 않았다. 묄렌도르프는 독일의 위신 문제라고 생각하고, 리홍장에게 답례 방문을 하지 않는다면 베이징 총리아문에 항의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이튿날 리홍장이 독일 영사관으로 찾아왔다. 테라스에 꼿꼿이 선 채 리홍장을 맞은 묄렌도르프는 리홍장을 서재로 안내해 자리에 앉게 한 후, 책상으로 돌아가 무엇인가 열심히 적었다.

리홍장이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시오?’ 하고 묻자 묄렌도르프는 ‘예의범절에 관한 책을 집필하는 중이오. 요즘 예의범절을 모르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라며 유창한 중국어로 대답했다. 이에 리홍장은 크게 웃으며 ‘우리는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오.’하며 묄렌도르프의 어깨를 두드렸다고 한다. 중국인에게 ‘친구가 되겠다’는 말은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일을 통해 리흥장과 묄렌도르프는 친구가 되었다.

묄렌도르프는 리훙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독일 크루프상사가 청국 육군에 무기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계약과 불칸상사가 청국 해군에 군함을 공급하는 계약을 연이어 성사시켰다. 이에 크로프상사는 묄렌도르프에게 대리영사직을 사임하고 톈진 지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묄렌도르프는 독일 공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거절했다. 이에 리흥장은 독일 외교부에 묄렌도르프를 정식 외교관으로 고용해달라고 직접 편지까지 썼다. 하지만 묄렌도르프는 외교관이 되지 못하고 결국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코리아 드림을 이룬 최초의 외국인
묄렌도르프는 독일 공사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리훙장의 막료로 들어갔다. 마침 리훙장은 해관 설립과 외교를 돕기 위해 조선으로 파견할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묄렌도르프가 적임자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아시아에서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이라고 불릴 만큼 서양인에게 매력적인 땅이었다. 실제로 조선과 임용 계약을 체결하고 묄렌도르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권한과 그 어떤 공사보다도 더 많은 보수와 그 어떤 대신보다도 강력한 지위를 얻는 천일야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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