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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에 초청된 최초의 서양인, 묄렌도르프 ②

2011-03-26

최초로 코리안 드림을 이룬 조선 관리 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의 코리안 드림은 그가 한국에 첫발을 내딛기 전부터 이루어졌다. 묄렌도르프가 조선 국왕의 고문 겸 해관장으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톈진 외교가에 퍼지자 그의 숙소에는 조선으로 진출하기를 희망하는 상인들과 조선에 자제들을 취직시키려는 중국 관리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더 이상 청국 해관과 독일 공관에서 무시당하던 묄렌도르프가 아니었다. 청국의 외교를 전담하던 북양대신 리홍장은 조선으로 떠나는 묄렌도르프를 위해 연회를 열며 묄렌도르프에게 물었다.
“조선 국왕 앞에 무릎을 꿇겠느냐?”
“총독께도 그러한 경외의 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그런 일을 할 리 있겠습니까?”

리홍장과 청국의 이익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묄렌도르프의 다짐이었지만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도착하자마다 국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상께서 중희당으로 나아가 전 독일 영사 목인덕을 소견하셨다. 목인덕이 전에 올라와 배읍하고서 기둥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서자, 상이 의자에 앉았다. 상께서 전하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먼 길을 오는 동안 평안하였는가?”하니 목인덕이 아뢰기를 “평안하였습니다”하였다. 목인덕이 여쭙기를 “성상의 체후는 평안하십니까?”하니 상께서 전하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좋다”하였다. 목인덕이 아뢰기를 “미천한 외국인으로서 감히 성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공무에 근신하며 힘쓰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믿고서 임무를 내려 주소서”하니 상께서 전하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그대의 말을 따를 것이니, 그대는 직임에 부지런히 힘쓰라”하였다. 목인덕이 마침내 물러갈 것을 고하고 나가자, 상께서 의자에 앉았다. 상이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 승정원일기, 1882년 11월 17일


묄렌도르프는 근시가 심해서 안경을 쓰지 않고서는 걸음을 걷기도 힘들었다. 이에 고종은 묄렌도르프에게 자신 앞에서 안경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 국왕 앞에서 안경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묄렌도르프는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묄렌도르프에게 관복과 저택을 하사했다. 그 저택은 임오군란 때 살해된 민겸호의 저택으로 묄렌도르프는 이를 서양식으로 개조해 최초의 개량 한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고종은 묄렌도르프에게 신설되는 통리아문의 참의(외교부 차관보)에 임명했다. 통리아문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편되면서 묄렌도르프는 한 달 만에 차관으로 승진했다. 고종은 묄렌도르프에게 관세청장과 중앙은행장까지 겸직하는 등 35세의 나이에 조선의 외교, 통상, 통화 정책을 독점하는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다.

조선에서 남긴 묄렌도르프의 업적
묄렌도르프는 권한이 많았던 만큼 외교, 관세, 통화 정책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먼저 외교 분야에서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수교 협상을 벌여 조약을 체결했고, 프랑스, 오스트리아와는 구두로 조약을 체결했다. 실제로 묄렌도르프 혼자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5개국과 조약을 조인하거나 비준한 반면, 이후 조선이 추가로 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 4개국뿐이었다. 또한 총세무사로서 상하이까지 찾아가 20여 명의 해관 직원을 모집한 후 인천, 원산, 부산에 해관을 개설하기도 했으며, 그밖에도 서양과 합작을 통해 다양한 사업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 국왕이 청국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 순간, 청국이냐 조선이냐의 양자택일 상황에 몰리면서 묄렌도르프는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묄렌도르프는 결국 조선 국왕을 선택했다.

1885년 1월, 조선은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해 갑신정변 기간 동안 일본 공관이 불타고 다수의 일본인이 희생당한 것에 대한 배상으로 배상금 10만 엔과 공관 수리비 2만 엔을 지급하며, 국서를 통해 사의를 표명하기로 합의했다. 다음 달 묄렌도르프는 사죄를 위한 사절의 부사에 임명돼 정사 서상우와 함께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묄렌도르프는 조선 국왕을 설득해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와 협상할 전권을 얻었다.

제1차 조·러 밀약
묄렌도르프는 도쿄에서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청국과 일본이 조약을 체결해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면 그 틈을 이용해 러시아는 조선 군대의 훈련 교관으로 장교 4명과 하사관 16명을 파견하고, 조선은 그 대가로 영흥만을 러시아에 조차할 것을 합의했다. 소위 ‘제1차 조·러 밀약’을 체결한 것이다. 러시아 체력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지금까지 청국이 하던 역할을 러시아로 대체하는 것으로 조선으로서는 그다지 달라질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청국의 간섭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러시아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제1차 조·러 밀약은 청국을 비롯해 일본, 영국 등 여러 국가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러시아와 교전중이던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 점거하고,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스페에르는 묄렌도르프와 맺은 밀약을 정식으로 체결하기 위해 조선을 찾았다. 하지만 영국, 청국, 일본으로부터 협공을 받은 조선 정부는 협약 조인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청국, 일본 신문들은 묄렌도르프가 러시아에 매수되었으며, 해관을 방만하게 운영하고, 독일인만 우대하고 있다고 일제히 비난했다. 이에 조선 국왕은 톈진으로 사신을 보내 리훙장에게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경위를 해명하고, 모든 책임을 묄렌도르프에게 떠넘겨 묄렌도르프의 해임과 청국으로 소환을 요청했다. 조선을 위한다고 한 묄렌도르프의 행동이 결국은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해관 총세무사, 전환국 총판에서 차례로 해임되고, 2년 10개월 동안의 짧은 조선 관리 생활을 청산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묄렌도르프가 전환국 총판에서 해임되기 하루 전, 러시아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청국을 배신하고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한 대가로 묄렌도르프는 모든 것을 다 잃고, 훈장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조선에서 해임된 후 톈진으로 소환된 묄렌도르프는 리훙장과 면담에서 자신은 영국의 농간에 억울한 누명을 썼을 뿐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리훙장의 막료, 청국 해관 세무사 등으로 일하다가 1901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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