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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의료 선교사에서 만병수 개발자가 된 어을빈

2011-04-02

개항 이후, 조선 선교사들의 다양한 활동
기독교 선교사 중에는 한국 근대화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크나큰 기여를 한 사람이 많았다. 선교사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교한 것도 중요한 역할이지만 특히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연세대학이나 이화여대 등 명문 사학 중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적지 않고,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 되는 제중원, 이화여대병원의 전신이 되는 보구여관 등도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의료 기관이었다.

실제로 고종의 어의를 역임한 알렌은 초대 주미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활동했으며, 헐버트는 최초의 영어 교육기관의 육영공원의 교사로 입국했다가 선교사로 변신, 그 후 출판사를 경영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 선교사들은 종교만 전파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활동을 한 선교사는 바로 어을빈이다. 어을빈은 의료 선교사로 파견되었다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병원장으로 활동했다. 그 후 '만병수'라는식민지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의약품의 개발자가 된 인물이다.

의료 선교사, 어을빈
어을빈의 원래 이름은 찰스 휴스테츠 어빈(Charles H. Irvin)으로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1893년 25살 때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부산에 이주했다. 그 후 사망하는 순간까지 42년을 줄곧 부산에서 살았다. 그러나 어을빈의 선교사 활동은 1911년까지이고, 나머지는 의사와 제약업자로 살았다. 하지만 의료 선교사로서의 활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병수'라는 의약품을 개발한 것이다. 1933년 당시 만병수 매출액이 20만원에 달했다니 단일 의약품으로는 어마어마한 매출액이었던 것이다.
문둥병 환자의 은인이며 만병수의 원조인 미국 의학박사 어을빈씨는 그간 심장병으로 신음하다가 지난 8월 오후 11시 30분에 부산 본정통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씨는 외국인으로서 부산 최초의 선교 사업에 활동하였는데, 1869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여 그곳 주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젊은 의학박사의 칭호를 얻은 후 기독교 선교사의 중임을 지니고 25세의 청년으로 조선에 건너와 제일 먼저 부산 교회당을 건설하는 한편 조선 여성을 위하여 여학교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문둥병자를 위하여 부산나병원을 세우고 남선 가지를 방황하던 병자들을 수용하였다.

1898년부터 병원을 개설하여 만병수를 제약하여 최근에 이르러는 연 판매고가 20만원을 돌파하게 되었으며 매년 천여 명씩 적빈한 환자를 무료로 치료하는 데 사재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앞으로 조선 사회를 위하여 많은 희망과 계획을 가진 체 세상을 떠난 것은 실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며, 장의는 금명간 경성에서 많은 본국 선교사의 손으로 거행하리라 한다.
- 조선일보, 1933년 2월 11일

어을빈은 조선에 입국한 이후 조그마한 시약소로 의료선교 사업을 시작해 1903년 뉴저지 몽클레어 교회의 후원으로 부산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전킨기념병원’을 설립했다. 1909년에는 부산 최초의 한센인 구료·요양시설인 ‘부산나병원’을 설립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만병통치약, 만병수 개발
병원을 개원한 후 어을빈은 만병수라는 물약을 개발해 팔았다. 만병수는 애초 위장병 약으로 개발되었지만, 감기, 두통, 치질, 임질까지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부산에서 시작된 만병수 열풍은 평안도와 제주도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고, 부산우체국에서 전국으로 발송하는 만병수 소포만 하루에 100~150상자에 달했다. 만병수의 1년 매출액은 20만을 웃돌았다. 만병수의 인기를 발판으로 어을빈은 자본금 15만원으로 어을빈제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만병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무엇보다도 복용하기 간편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약방에서 생약을 사다가 일일이 달여 먹고만 있었는데, 그런 무렵에 불에 달이지 않고 병마개만 따서 그냥 입에 대고 마시면 되는 만병수가 나왔기 때문에 잘 팔려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간호사, 양유식과의 사랑
만병수의 성공으로 어을빈은 선교사에서 백만장자가 되었고, 그의 부인은 부산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규범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가로 명망을 얻는 등 부산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다. 그러나 1911년, 어을빈 부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어을빈의 병원에는 1888년 부산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했다가 귀국한 양유식이라는 간호부가 있었는데, 어을빈이 양유식을 총애하다 그만 사랑에 빠진 것이다. 유부남 선교사와 젊은 한국인 간호사와의 사랑이 알려지자, 북장로회 선교본부는 어을빈을 미국으로 소환했고, 어을빈 부인은 어을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어을빈은 소환을 거부하고 아내와 이혼한 후, 부산 본정에 어을빈 병원을 개원하고 양유식과 재혼을 했다.

어을빈은 양유식과 재혼하며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의 남편이자 개업의사로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양유식과는 나이 차가 많고, 문화적 차이가 커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결혼 후 양유식이 폐결핵을 앓으며,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부산 초량에 집을 얻어 혼자 나와 요양을 했다. 그 즈음 양유식은 일본인 보험회사 직원 요시하시와 눈이 맞아 동거를 하고, 요시하시의 일본 본적지에 혼인계까지 냈다. 그러나 요시하시가 양유식의 재산이 탐나서 유혹한 것이란 소문이 퍼지고, 어느 날 알 수 없는 불로 인해 집이 타는 등 여러 불상사가 생기자 양유식은 심한 충격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요시하시는 양유식이 남긴 재산을 가로채고자 소송까지 일으켰다.

양유식이 자신을 버리고 일본인과 동거를 시작한 후에도 양유식을 향한 어을빈의 사랑은 식지 않았다. 양유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어을빈은 좌천동 공동묘지에 묻힌 그녀의 무덤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꽃다발을 바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사흘에 한 번씩 꼬박꼬박 그 무덤을 찾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뿐만 아니라 양유식의 묘에 놓인 꽃다발을 훔치러 오는 동네 아이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감시원을 상주시키기까지 했었다.

선교사 어을빈, 부산에서 눈을 감다
어을빈은 선교사를 사임하고, 양유식이 죽은 이후에도 선교사 활동을 이어갔다. 한센인 구제를 위해 거금을 기부하고, 자신의 병원을 찾아온 가난한 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병원 뜰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내쫓으려고 공포를 쏘거나, 동냥아치를 돕는다는 구실로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 문 밖으로 동전을 가마니 채 던지고 동전을 주워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등 기행을 일삼아 지탄을 받기도 했다.
어을빈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로 부산에 건너 온 후, 제약업자로 변신해서 백만장자로 지내다 1935년, 부산에서 눈을 감았다. 어을빈이 사망한 이후 어을빈제약은 그의 아들이 물려받았고, ‘만병수정(萬病水錠)’이란 알약 형태로 판매가 재개돼 회사가 문을 닫은 1942년까지 판매되었다. 어을빈과 양유식의 사랑은 2005년 부산 APEC 회의 기념공연에서 춤극 ‘부산아리랑’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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