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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황금왕, 최창학

2011-04-09

1930년 조선의 황금 열기

1930년대는 전 세계가 대공황에 시름하던 시절이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남녀노소, 상하귀천 없이 모두 황금에 열광해 '황금광시대'라 불렸다. 당시 조선은 금본위제 시대라 금이 사치품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화폐였다. 금본위제가 위기로 내몰리면서 일본 화폐 가치는 폭락하고 반대로 금값은 폭등했다. 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금속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식민지 조선에서도 금광 열풍이 거세게 분 것이다.
지금 조선은 그야말로 황금광시대다. 평안도나 함경도나 전라도나 어디를 물론하고 산이 있고 바위가 있고 흙이 있는 곳곳에는 망치를 든 탐광꾼들이 없는 곳이 없고 양복쟁이 상투쟁이 어른 어린애 할 것 없이 눈코 박힌 사람이 두셋만 모여 앉은 자리에서 금광 이야기 나오지 않는 곳이 없으리만치 금광 열이 뻗치었다.
- 삼천리, 1934년 5월호 < 삭주 금광 채광관>

사람들이금광으로 모여든 가장 큰 이유는 금광 외에 뾰족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에는 국제 곡물 시세가 폭락한데다 두 해 연속 풍년이 들어 한국의 농촌 사회는 빚더미에 올랐다. 풍년에 배가 고프니 말세가 가까울 징조라는 이야기까지 돌고, 상공업이 발달된 시기도 아니었다. 때문에 장려금이 쏟아지는 금광으로 모인 것이다.

당시 금광으로 일확천금한 부자 중에 현재까지 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집안은 조선일보 방씨 집안이다. 40세가 넘어서 금광에 뛰어든 방응모는 3년 만에 다릿골 금광, 즉 교동금광을 개발해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그 후, 교동금광을 일본인 재벌에게 매각하고 그 매각 자금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다.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황금 왕은 따로 있었다.

조선의 황금귀, 최창학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황금 왕은 따로 있었다. 바로 최창학으로 황금 귀신처럼 황금이 많다는 뜻에서 '황금귀'라고 불렸다. 당시 최창학보다 재산이 많은 조선인은 토지대왕 민영휘뿐이었다. 하지만 민영휘는 한말 민씨 척족 출신으로 부정부패로 치부한 반면 최창학은 맨손으로 땅에서 금을 파서 부자가 되었으니 훨씬 정당한 부자라고 할 수 있다.
벼락부자 벼락부자 하지만 근래 조선 사람으로 이 최창학 군처럼 벼락부자가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군은 본래 평안북도 구성군의 한미한 촌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집이 한미하니만치 무슨 공부도 별로 한 것이 없고 삼십여 세가 되도록 장판(市場) 혹은 금점판으로 돌아다니며 잡기하기로 일을 삼아 금점에서 여간 돈푼이 생기면 그것을 가지고 으레 장판에 가서 투전화투 같은 노름도 하고 혹은 노름판에서 고리대금도 하다가 밑천이 달리면 또 금광으로 뛰어가서 자기 손으로 벽채, 금 삼태를 들고 광부가 되어 금을 캐었다.
그러나 산에 많이 다니면 풍수가 아니라도 묏자리를 잡을 줄 알고 물에 자주 다니면 어부가 아니라도 고기 다니는 곳을 안다고, 그는 여러 해 동안을 금점판으로 돌아다닌 까닭에 금광에 관한 경험과 지식은 상당히 있어서 몇 해 전에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금광 하나를 발견하여 자기의 삼촌 최 첨사에게 약간의 자금을 얻어가지고 채금을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세상에 유명한 삼성사란 금광이다. 이 금광은 한참 잘 날 때에는 20관 한 포대 20냥씩이 나서 불과 몇 달에 돈벼락을 맞아 수백만 원의 장자가 되고 그 뒤 미쓰이 상사에서 그것을 또 삼백만 원에 사가게 되니 놀라지 마시오. 적수공권으로 있던 최씨는 하루아침에 약 육백만 원의 거금을 가진 벼락부자가 되었다.
- 별건곤, 1932.11. <조선의 황금귀 최창학>

평북일대의 금광을 전전하며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최창학은 3·1운동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했던 1919년, 고향집 근처 구성군 조악동에 자리를 잡고 운명을 건 한 판 승부를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30세가 넘은 나이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5년 동안 매달린 끝에 1923년 조선에서 손꼽히는 금광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삼성금광이다. 그렇다고 삼성금광 하나만으로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924년 5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최창학 앞으로 독립자금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실제 임시정부였는지 임시정부를 가장한 마적대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치안이 어지러운 산속 깊숙한 광산에 황금이 쌓여 있다 보니 마적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창학은 그 요구를 거부하고 일본 경찰에 신병 보호를 요청했다. 그 덕분에 삼성금광은 독립단의 습격을 받았다.
그때 강도단들은 반항하는 촌민 서너 명을 쏘아 죽이고 모두 모여 서라 하여 모아 놓고는 “우리 목적은 최창학에게 있다. 너희들이 최창학을 잡아내면 2천원을 줄 터이다, 최창학은 너희들 속에 숨어 있을 터이니 어서 발견해내라, 만일 찾아내지 않으면 너희들은 모두 이것이다." 하며 또 한 번 공포를 쏜다. 대담한 최창학은 그 말을 듣자 등골에서 찬 땀이 흘렀다. 목전에는 시체가 보이고, 무기를 가진 강도단이 있다. 그는 어름어름하며 몸을 피하여 그 부근 길가에 있는 다리 아래에 숨었다. 여러 광부와 강도단들의 수사는 더욱 맹렬하다. 그는 참다못하여 다시 몸을 일으켜 그 뒤 산곡으로 올랐다. 정신이 없이 어떻게 올랐는지 한참 만에 이마에서 땀이 자꾸 흘러내리기에 손으로 만지니, 땀이 아니라, 피였다. 그제야 보니 그 험한 칼날 같은 바위 속을 기어오느라고 손과 발과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멀리 촌락을 내려다보니 촌가에서는 불이 일고 있었다. 최창학은 이날 습격에 생명만은 구하였다. 그리고 사무소에 와 놀던 순사 두 명은 무참히 죽었고 촌민도 수 삼 인이 죽었다. 손해라고는 사무소 금고 속에 두었던 현금 6천원과 금괴 1만 원짜리 한 개였다.
- 삼천리, 1933년 9월

이 사건을 계기로 최창학은 1924년 한 해 동안에만 시국을 표방한 무장 독립단의 공격을 4차례, 단순 강도를 37차례나 당했다. 열흘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총칼 든 사람들과 마주쳤고,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다. 최창학이 이처럼 수난을 당하고 있을 때, 정작 최창학 자신보다 더 놀란 것은 삼성금광 부근에 금광을 가진 다른 광주들이었다. 그들은 황금을 떠나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생각에 헐값에 광구를 내놓았다. 하지만 금이 많이 난다고는 해도 밤이면 무법자들이 총, 칼, 도끼를 들고 마구 설쳐대는 금광을 사려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최창학이 매물로 나온 모든 금광을 한꺼번에 샀다. 이듬해부터 평북 일대의 치안은 안정되었고, 최창학은 조선 최대의 금광 재벌로 떠오른 것이다.

최창학은 지금의 충정로인 죽청점에 저택을 짓고, 죽첨장이라 이름을 지었다.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저택의 하나로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있다. 바로 강북삼성병원 현관으로 이름은 '경교장'으로 바뀌었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가 살던 곳으로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친일을 사죄하기 위해 김구에게 자신의 저택 죽첨장과 정치자금을 헌납했다. 죽첨장이 경교장으로 바뀐 것은 그 이후이다. 그러나 최창학은 그 부를 길게 누리지 못했다. 남북 분단으로 재산의 80%가 북한에 남아 있어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김구에게 정치자금을 댔다가 이승만의 집권 이후 정치 탄압을 받아 평범한 부자로 전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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