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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경성제국대학 입시 소동

2011-04-16

식민지 통치의 사령탑, 경성제국대학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초등학교가 2:1, 중등학교가 10:1로 입시 경쟁이 치열했다. 초중등학교의 경쟁이 이처럼 치열하다보니 대학입시 경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중등학교 입학시험만큼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경쟁이 덜해서가 아니라 너무 좁은 문이라 평범한 학생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복 이전까지 조선에는 단 한 곳의 대학이 있었다.

조선 유일의 최고학부는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으로 연희전문(연세대), 보성전문(고려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 사실상 대학교육을 실시하던 전문학교가 있었지만, 총독부는 이들 사립학교에 대학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35년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810명뿐이었다. 총독부는 너무 많은 조선인 학사가 배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1918년까지만 해도 일본의 대학은 도쿄제대, 교토제대, 규슈제대, 도호쿠제대, 홋카이도제대 등 5개 제국대학이 전부였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이니 와세다 대학이니 하는 유서 깊은 사학들도 1918년 대학령 개정 이후에야 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일본 정부는 대학을 국가의 수요에 응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인식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사립대학보다 제국대학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대학령 개정 이후에도 5개 제국대학 출신들에게 배타적인 특혜를 줬다. 법학부 졸업자에게는 고등문관시험의 1차 시험을 면제하여 고급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무시험검정에 의해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곳에서든 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줬다. 민간기업에서도 제국대학 출신자에게는 동일한 노동을 하는 사립대학 출신자보다 봉급을 더 주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는 제국대학 출신자에게 각종 특혜를 주고, 제국대학 출신자는 국가의 충직한 신민이 되는 완벽한 공생관계였다.

경성제국대학 입학식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것은 1924년으로 원래 이름은 조선제국대학이었다. 일본은 원래 제국대학에 지역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여서 별 생각 없이 조선제국대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조선제국의 대학이라고도 읽히자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한국 최초의 대학입시는 1924년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간 실시됐다. 당시엔 신학기가 4월에 시작됐기 때문에 입시시즌이 3월이었다. 내로라하는 조선인 수재들이 모였음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가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치른 조선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는 647명이 응시하여 180명이 합격했다. 그러나 이 180명의 수재는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입학식을 겸한 개교식을 치르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학생이 되었다. 입학식에서는 노골적으로 조선인을 차별해 신분 시험까지 쳤다.
출입문에서 사무원이 주는 그 학교일람 비슷한 인쇄물을 읽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서글픈 느낌이 머리로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초대를 받아 온 사람들도 거의 전부가 일본인이고, 조선 사람 특히 제 정신을 가진 조선 사람은 몇 안 됐다. 나머지는 모두 다 일본인 권력자 앞에 가서 허리를 굽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남의 세상에 돈만 내는가 하였다.
식은 예정보다 40분가량 늦게 시작되었다. 항용 있는 ‘칙어봉독’과 ‘기미가요’ 합창의 식순이 지난 뒤에 아리요시 예과부장이 단에 올라 식사를 하였다.
“제군에게 배부한 인쇄물 중에 있는 것과 같이 현재 본교 학생은 문이과를 통하여 전부 168명 중에 조선인은 44명뿐이오. 기타는 모두 일본인인데 그중에는 일본에서 중학을 졸업한 사람이 반수 이상 있으나 그 다수는 조선에 부형이나 친척을 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금춘 예과생을 모집할 때에 조선학생에게는 학교에서 보는 학과시험 이외에 특별히 경찰서에 의탁하야 ‘신분시험’까지 보게 하면서도 일본 각지의 신문에 모집광고까지 내서 일본학생을 모집한 데 대한 변명이었다. 그저 그럴 것 없이 “조선 사람에게는 고등교육 기회를 내심 주고 싶지 않으나 기미년에 약속한 것도 있고 또한 외국 사람 보는 눈도 있고 하여 부득이 명색이나마 대학을 만든 이상, 자기의 이익을 도모치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는 것이 오히려 설명하기에 조리도 있고 또한 말하기도 쉽지 않을까 하였다.
- 개벽, 1924년 7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개교식을 보고서>

경성제대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공부한 최초의 학교로 경기중학교는 일본인 학교, 경기고등보통학교는 조선인 학교식으로 구분돼 있었다. 문제는 입학시험도 똑같이 봤다는 것이다. 문과의 경우 입시 과목이 국어와 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받아쓰기, 작문) 외국어(해석, 국문영(독)역, 받아쓰기, 작문), 수학(대수, 평면기하), 역사(서양역사와 국사 전부)였는데, 모든 시험은 일본어로 출제되고 일본어로 서술해야 했다. 무엇보다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과 외국어로 익힌 학생을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시킨 것 자체가 공평하지 않았다. 입학생 중에서 조선인이 30%에 달했으니 불공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과 80명, 이과 80명, 총 160명을 뽑을 예정이었지만 되도록 많은 지원자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과별로 10명씩 증원하여 최종합격자는 180명이었다. 합격자를 발표하면서 당국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거듭 다짐했다. 하지만 입시결과는 예상대로 조선인 학생의 참패였다. 241명의 조선인 지원자 중 합격자는 법학부 9명, 문학부 19명, 의학부 16명 합계 고작 44명이었다. 그러나 차별하지 않는 차별을 고려하면 그 정도의 합격자 숫자도 경이적인 수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입학식 당일 조선인 합격자는 모두 상위권 합격자라는 이상한 결과를 알게 됐다.

일본의 제국대학은 입학시험 석차대로 입학식 자리를 배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때문에 입학생은 모두 자신의 입학시험 석차를 알 수 있었다. 일본인 학생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그 시험에서 1등에서 10등까지 모조리 조선인 학생이 석권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 합격자는 모두 전체석차 1/3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상한 결과는 그 후 입시 때마다 되풀이됐다. 조선인 학생은 어지간히 높은 성적을 받지 않고서는 합격할 수 없었지만, 일본인 학생은 성적을 웬만큼만 받아도 합격할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걸러진 조선인 학생들은 대학 재학 중에도 일본인 학생보다 학업성취도가 훨씬 높았다. 이처럼 조선인 입학생이 상위권을 석권한 이유는 의도적으로 조선인, 조선 거주 일본인, 일본 거주 일본인의 비율을 1:1:1의 비율로 맞추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엄청난 차별이었던 셈이다.

경성제대 초대 수석자는 경기고보를 수석 졸업하고 법학부를 지원한 19세 소년 유진오로 제국대학 관례에 따라 입학식에서 학생대표로 선서를 했다. 유진오는 경성제대 법학부를 수석 졸업했으니 모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수재로 일본인보다 일본어를 더 잘 구사했고, 소설가로 이름을 떨칠 만큼 한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났다. 그래서 해방 이후 고려대 법대 교수로 있으면서 제헌 헌법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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