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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한 단면, 완바오산 사건

2011-04-23

1931년, 중국인 배척 폭동의 원인, 완바오산 사건
1931년 7월 5일, 평양에서 중국인 대학살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밤 평양시내는 시외와 인근 진남포까지 중국인 상점과 가옥은 모조리 불탔다. 총독부는 이틀 동안의 폭동으로 평양에서만 중국인 119명이 사망했고, 163명이 중상을 당했고, 63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국민당 정부의 발표는 사망자 133명, 부상자 289명, 행방불명자 72명으로 피해규모가 훨씬 컸다. 중국인 배척 폭동의 원인으로 완바오산 사건이 지목됐다.

7월 5일 밤. 그 밤은 진실로 무서운 밤이었다. 역사를 자랑삼는 평양에 기록이 있은 이래로 이런 참극은 처음이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의 도시 평양은 완전히 피에 물들었다. 하기는 우리가 인류사를 뒤져서 피 다른 민족의 학살극을 얼마든지 집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유아와 부녀가 살해된 시체가 시중에 산재한 일이 있었던가! 나는 그날 밤 발밑에 질척거리는 피와 횡사한 시체를 뛰어 넘으며 민족의식의 오용을 곡하던 그 기억을 되풀이하여 검열관의 가위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면서 거두절미의 회고록을 독자 앞에 공개한다.
사건 전야에 부내에서는 완바오산 사건을 빙자하여 중국인을 힐난, 협박, 구타하는 등 경미한 충돌이 6건이나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다음날 밤 중국인 대학살이라는 인류 유혈사의 한 페이지를 더하게 하는 장본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중국인은 물론 폭동 군중조차도 몰랐으리라.

- 동광, 1931년 9월

완바오산 사건은 1931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완바오산 지역 산싱바오로 이주한 조선농민 200여 명은 중국인 허용더로부터 미개간지를 임차했다. 하지만 허용더 역시 그 땅의 지주가 아니라 임차인일 뿐이었다. 허용더가 지주와 맺은 임대차계약서 마지막 조항에는 “만일 지방 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으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허용더는 지방 정부의 허가가 나기도 전에 임차한 땅을 조선농민에게 재임대했다. 법적으로 허용더와 조선농민이 맺은 계약은 무효였다. 미개간지를 임차한 직후, 조선농민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 20여 리 떨어진 이통허의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수로는 폭과 깊이가 각각 10m, 길이가 8km에 달했다. 수로가 지나가는 땅도 사유지였지만, 조선농민은 지주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수로 공사를 단행했다.

이에 중국 농민들은 반발했다. 남의 땅을 제멋대로 파헤쳐 수로를 놓는 것도 문제였지만, 멀쩡한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댐을 쌓는 바람에 하천을 통한 뱃길이 막히고, 수로 부근 논밭이 상습 침수지역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방 정부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수로 공사를 중단할 것을 명령했지만, 조선농민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창춘 주재 일본영사는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경찰 60여 명을 산싱바오로 파견했다.

조선인이 법적으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 영사가 조선인 보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농민의 수로 공사는 엉뚱하게도 중국과 일본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일본경찰의 보호 아래 수로가 완성되자, 격분한 중국농민 400여 명은 농기구를 들고 800m 가량의 수로를 막았다. 일본경찰은 수로를 파괴하는 중국농민에게 발포했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7월 1일의 충돌 이후, 중국과 일본이 외교적으로 옥신각신할 뿐 완바오산 일대에서 더 이상의 무력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오보로 인한 중국인 배척 폭동
1931년 7월 2일과 3일 연속으로 조선일보 호외가 이어졌다.
“산싱바오(三姓堡)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200여 동포 또다시 피습. 완공된 수로를 전부 파괴. 중국농민 우리 동포를 대거 폭행.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여 명 동포 충돌 부상. 대치한 중·일 관헌 한 시간 여 교전. 중국 기마대 600여 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그러나 이 호외는 오보로 조선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중국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고, 흥분한 사람들은 전보의 발신지가 ‘산싱바오’가 아니라 ‘창춘’인 것을 눈여겨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선일보 창춘 특파원 김이삼은 일본영사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사실 확인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서둘러 타전했고, 서울의 본사 편집국은 전보만 믿고 부랴부랴 호외를 간행했다. 너무 서둘러 간행한 나머지 부상이 살상으로 오기된 것조차 걸러내지 못했다.

첫 번째 호외가 간행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7월 3일 새벽 2시, 인천 율목리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떡집 앞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깨졌고, 잠결에 놀라서 뛰쳐나온 중국인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구타당했다. 성외리, 중정, 용강정 등 7곳에서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중국인 배척 폭동은 이튿날부터 전국적으로 번졌다. 급기야 7월 5일 평양에서 100여 명이 학살되는 대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조선일보 호외 이후 인천, 서울, 평양, 진남포, 부산, 전주, 대구, 개성, 사리원, 원산, 함흥, 흥남, 청주, 공주, 이리, 군산, 안주, 재령, 신의주, 의주, 선천, 수원, 청주, 춘천, 마산, 선천, 운산, 해주, 안변 등 전국적으로 400여 회의 중국인 배척 폭동이 일어났다. 심지어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 있는 중국인들을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 남짓 지속된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전국적으로 중국국민당 정부 추산 142명의 중국인이 사망했고, 546명이 부상당했고, 91명이 실종되었다. 조선에 있던 7만여 명의 중국인 중 1만7천여 명이 영사관에 피신했고, 재산 피해도 400만원에 달했다. 인명 피해의 대부분은 7월 5일 밤, 무정부 상태에 놓인 평양에서 발생했다.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배척 폭동은 즉각 중국에도 알려졌다. 중국농민들에게 박해받던 조선농민들의 신변은 더 위태로워졌고, 조선에서 중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만주의 조선인들도 창춘의 일본영사관으로 피신했다. 다행히 중국에서 조선농민들에 대한 보복 폭행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김이삼 특파원은 중국인과 조선인 앞으로 사과문을 발표했고, 한용운, 안재홍, 송진우 등 민족지도자들은 중국인 배척 폭동이 조선인 전체의 의사가 아님을 천명하고,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중국인 배척 폭동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 일본경찰은 일본 국민인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중국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창춘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이삼 특파원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했으며, 평양에서 최악의 폭동이 발생한 날 밤 경찰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곧잘 중국인 배척 폭동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려는 일본의 교묘한 음모 때문에 발생한 불상사였다고 설명하지만, 설령 일본인의 음모가 작용했다 하더라도 조선인이 백여 명의 무고한 중국인들을 살해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완바오산 사건은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모두 조금씩 잘못한 부분이 있다. 중국인은 먹고살 것이 없어 이주한 조선인들을 매정하게 박대했고, 조선인은 일본경찰의 그늘에 숨어 중국의 공권력과 법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일본은 조선인을 앞세워 대륙 진출을 위한 야욕을 드러냈다. 세 민족이 모두 조금씩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배척 폭동 탓으로 조선인만 가해자로 몰렸다. 일본 제국주의자가 음모를 꾸몄더라도, 만약 조선인과 중국인 두 민족이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배려했더라면 완바오산 사건이나 그 후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배척 폭동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인 배척 폭동은 개인과 개인 사이와 마찬가지로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이해와 배려가 최선의 선택임을 보여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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