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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2013-05-23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1593년, 행주산성에서 왜병과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3만 명의 왜병이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아홉 차례나 공격을 해 왔는데,
1만여 명의 군사와 치마에 돌을 담아 나른 부녀자들이 힘을 모아 왜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행주대첩’의 역사적인 승리에는,
임진왜란이 벌어졌던 7년 간, 우리 군을 총지휘했던.. 조선의 명장, 권율이 있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뒤늦게 관직에 오르다..

권율은 대대로 고위관직을 맡아온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권율의 할아버지는 강화부사를 맡았고, 아버지 권철은 영의정을 지냈다.
또한 권율의 사위가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항복’이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권율의 출세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2년에 마흔 다섯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권율은 작은 관직들을 맡아 하다가,
그의 나이 쉰다섯에,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권율은 잠시 관직에서 떠나 있었는데,
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의 목사로 다시 부임하게 된다.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에서 벌어진 ‘이치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한 권율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을 하게 됐다.

이후, 수원의 독성산성 전투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얻은 권율은,
도성 수복을 위해 관군을 이끌고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평양을 되찾은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힘을 합하기 위해서였다.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던 권율은
지형을 살핀 뒤에, 수비하기 좋은 곳으로 행주산성을 택했다.
권율장군의 군사들이 행주산성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에,
왜군 역시, 행주산성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 동이 틀 무렵에 시작됐다.
3만 여명의 군사를 일곱 개 부대로 나눠 진격해 온 왜군에 비해,
우리 군은 3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새까맣게 몰려든 왜병을 상대로,
우리 군의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됐다.
며칠 간 계속 된 싸움에, 우리 군은 무기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이 때, 권율이 지시 한 것이 바로 부녀자들의 긴 치마를 잘라
거기에 돌을 담아 운반하는 것이었다.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운반하면,
무기가 떨어진 우리 군사들이 그 돌을 던져 왜군을 물리쳤다.
수적인 우세를 믿고 공격해왔던 왜군은,
장군만 세 명이 전사하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권율은 행주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을 총괄하는 ‘도원수’의 자리에 올랐다.
권율은 주로 영남지역에 주둔했는데,
이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울산과 순천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러 나서기도 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생을 마감하다...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던 전란이 끝난 1599년, 권율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권율은,
그해 7월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나라를 구한 전쟁의 영웅이 생을 마감 한 뒤,
국가는 영의정의 관직을 거두어드렸다.
그리고, 행주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권율은.. 비록, 다소 늦은 나이로 관직에 올랐지만,
나라가 위기해 처한 상황에서 큰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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