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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파브르, 나비학자 석주명

2013-03-14

한국의 파브르, 나비학자 석주명
일본인이 부러워한 조선인

손기정(孫基禎)과 석주명(石宙明).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부러워한 조선인은 이 두 명뿐이었다.
특히 석주명은 존경받는 학자였다.

1941년 일본 방문 때는 마이니치(每日)신문에는
'세계적인 나비학자 도쿄에 오다'라는 큼직한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당시 일본 학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이던
규슈(九州) 제국 대학의 에자키 데이조 교수는
석주명을 '어떤 나비 연구가보다도 뛰어나다.
유례없이 완벽한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극찬했는데, 마라토너 손기정에 비해 무명이나 다름없는 석주명.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온 국민이 압박에 시달리던
일제 강점기. 일본도 그에게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것일까?

생물학에 눈을 뜨다

1908년 11월 13일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어린 시절,
당시 황소 한 마리보다 비싼 타이프라이터를 어머니로부터 선물로 받을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1921년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는데, 숭실고보에서 동맹 휴학 사태가 일어나자 자퇴하고
이듬 해, 윤치호(尹致昊)가 설립한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겼는데,
송도고보로의 전학은 석주명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송도고보에는 유명한 조류학자 원홍구(元洪九)가
박물학(博物學)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것이다.
원홍구의 영향으로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된 석주명은
1926년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鹿兒島)고등농림학교'의
관문을 뚫은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서 유학길에 올랐고
일본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 교수의 총애 속에
곤충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29년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석주명은
1930년 모교인 송도고보 생물교사로 부임해 나비 연구를 시작했다.

나비와 한 세상

석주명은 본래 생물학에 관계있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력에 자신이 없어서 곤충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곤충이라면 누구나 밟는 첫 단계인 나비를 채집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또한 근무지인 송도고보는 연구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 에머리 대학 (Emory University) 캔들러(Candler) 총장의 자금 지원으로
1906년 설립한 송도고보는 교정이 와세다 대학보다 크고,
계단식 강의실과 실험실습 설비를 갖춘 이화학관 같은 시설이 있었다.

특히 지하 1층, 지상 2층의 박물관은
조선 제일의 표본실과 실험실·연구실·저장실·교실들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11년간 근무하며 나비 연구에 몰입한 석주명은
틈만 나면 전국을 훑으며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또한 여름방학에는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 전국 나비 표본을 들고 오기도 했다.

나비 분류학의 새 시대 열어

사실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하던 1930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간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 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무조건 ‘신아종, 신변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바로 자기 이름을 붙인 새 학명을 명명했다.

그러나 석주명은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 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하고,
외국 학자들에게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하여
기존에 등록된 종이나 아종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1940년,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일본 학자들이 같은 종인데도 다른 엉터리 학명을 붙여서 844종이라고 분류한
한국 나비를 248종으로 최종 분류함으로써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를 열었다.

<조선 나비 총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나비들과 살다가 떠난 나비박사

그렇게 ‘봄처녀나비’, ‘청띠신선나비’, ‘모시나비’, ‘풀흰나비’, ‘어리표범나비’...
수많은 나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나비와 함께 살아가던 석주명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도 나비의 꿈만을 꾸었다.

전쟁이 발발했지만 서울 와룡동 국립과학관에 모아둔 표본 75만마리를 지키기 위해
피난길에도 오르지 않은 석주명은 1950년 10월 6일,
폭격으로 파괴된 과학박물관으로 향하다가 불의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역사의 소용돌이와 동족 간의 대립 속에
한국은 세계적인 나비학자를 잃었지만
진귀한 나비를 발견하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달려갈 만큼
나비에 헌신했던 석주명의 열정은 세계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으니
석주명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과학적 명성을 더한 곤충학 연구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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